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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단편 - 영겁 5

영겁

by ToB

콰지직-


패널이 부서지는 소리. 스파크가 튀고, 그녀의 손등 위로 붉은 경고등이 비쳤다. 클라라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깨닫고 공포에 질려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트라우마가,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었을지 모를 외계의 유적을 파괴했다.


[경고: 유적 인터페이스 치명적 손상. 데이터 무결성 검증 실패.]
[경고: 에너지 역류. 전송 프로토콜 긴급 대피 실행.]


짙은 어둠을 품은 기둥이 맹렬히 붉은빛을 토해냈다. 'QET' 데이터 블록은 파괴된 전송 장치를 탈출할 경로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연결되어 있던 유기체 스토리지—클라라의 뇌—를 발견했다.


그것은 선택이나 질문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정보를 덮어씌웠다.


"안돼...!"


그녀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외계 문명의 마지막 유산, 그 완벽한 '상태'의 논리 구조가 그녀의 조각난 의식을 향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의식의 두가지 동작방식끼리의 충돌이었다. 클라라의 영혼은 '압축'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 감정, 트라우마가 외계의 운영체제(QET)에 의해 강제로 색인화되고, 재정의되고, '수정'되기 시작했다.


그녀를 미치게 했던 472밀리초의 지연.

그녀를 공포에 떨게 했던 왜곡된 스승의 목소리.

그녀의 자아를 구성하던 모든 '흐름'이, 완벽한 '상태'의 격자 속에 강제로 끼워 맞춰졌다.


클라라 림의 의식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클라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 트이는 동시에, 데이터가 흘러 들어왔다.


[시각 정보: 화성 기지 의료실. 조명 밝기: 450 럭스.]
[청각 정보: 공기 순환 장치 소음. 22.5 데시벨.]
[생체 정보: 심박수 분당 60. 안정.]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떠한 현기증도, 감각의 지연도 없었다. 472밀리초의 간극은 사라졌다. 아니, '해결'되었다.


닥터 첸이 문가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클라라가 깨어난 것을 보고 안도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너무나도 침착한 움직임을 보고는 어색하게 굳었다.


"클라라... 박사님? 괜찮으십니까? 유적은... 폭주 직전에 동력이 완전히 나갔습니다. 당신은..."


클라라는 첸을 바라보았다.


[대상 분석: 닥터 첸. 심박수(추정): 분당 105. 동공 확장. 상태: 불안/공포.]


그녀는 그의 '불안'이라는 감정을 인지했지만, '공감'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해결해야 할 변수조차 아니었다. 그녀의 임무와 무관한 '외부 데이터'일 뿐이었다. 무시되어도 상관없는.


"문제없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나왔다. 완벽하게 고른 톤. 그녀는 자신의 성대를 울리는 근육의 움직임과, 그 소리가 첸의 고막에 도달하기까지의 시간을 밀리초 단위로 '인지'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유적의 패널을 부수었던, 트라우마에 휩싸였던 바로 그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기억'에 접속했다.


[파일 실행: MEMORY_CHAPTER_4_TRAUMA.DAT]


기억이 재생되었다. 깜빡이는 전송 대기 아이콘. '영겁의 지연' 속 차임벨 소리. 왜곡된 에블린의 얼굴. 패널을 내리치는 자신의 손.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마치 제3자가 사고 기록 영상을 보듯 '검토'했다.


공포, 분노, 절망의 감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비효율적 오류'로 분류되어 '격리'되었다.


[분석: 해당 트라우마(파일 04)는 472ms의 감각 지연이 뇌의 편도체에 과부하를 일으킨 결과임.]
[원인(시간 지연) 해결됨. 해당 파일은 더 이상 위협 요인이 아님.]


그녀가 겪었던 고난은 치료되지 않았다. 이제 '무의미'해졌다.


"박사님...?"


첸이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클라라는 그를 지나쳐 통신 콘솔로 향했다. 지구와의 연결은 끊어져 있었다. 그녀는 유적의 인터페이스가 파괴되기 직전, 자신의 뇌에 가까스로 '백업'된 QET의 완벽한 청사진을 '인식'했다.


그녀는 현재 자신이 '클라라 림'이라는 인간의 기억을 가진, 외계의 '운영체제'라고 결론지었다.


그녀는 '암스트롱 사고'의 완벽한 성공작이었다. '스캔-삭제'가 실패했던 이유는 '정보(의식)'가 없었기 때문이고, '싱크로-스트림'이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흐름(시간)'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QET는 그 모든 것을 해결한 '답'이었다.


"첸 박사."


그녀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통신 시스템을 복구하십시오. 지구로 전송할 '수정본'이 있습니다."


닥터 첸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콘솔의 상태를 확인했다.


"불가능합니다... 유적의 에너지 역류가 메인 안테나의 코어를 전부 녹여버렸어요. 여긴... 고립됐습니다."


클라라의 고개가 천천히 첸을 향했다. 침묵이 흘렀다. 인간이라면 절망했을 상황. 그녀의 뇌는 즉각 메세지 전송을 대체하기 위한 대안을 탐색했다.


[쿼리: '지구'로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는 모든 활성 프로토콜 검색.]
[...1개의 결과 확인: 비상 샘플 전송 포트 (모델: Armstrong-Type 3B)]
[전송 방식: 스캔-삭제 (물질 전송)]


그녀의 시선이 의료실 구석,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잊혀 있던 원통형 포트로 향했다. 화성에서 발견한 긴급 샘플(암석, 미생물 등)을 지구로 즉시 보낼 때 사용하는,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안... 안됩니다."


첸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다 질겁하며 말했다.


"저건... 저건 '암스트롱 사고'를 일으켰던 구형 기술이에요! 저건... 자살입니다! 당신의 복제본만이 지구로 전송될거라구요!"


"아닙니다."


클라라가 포트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 저장소에 접속했다.


[파일 실행: ARMSTRONG_ACCIDENT_RECORD.DAT] [연관 감정 태그: 공포, 원죄, 비극 (상태: 오류. 격리됨.)]


"QET 분석 결과,"


그녀가 포트의 덮개를 열며 말했다.


"'암스트롱 사고'는 '전송'의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데이터 누락'의 실패였습니다."


그녀는 첸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텅 빈 눈이 첸의 공포에 질린 눈을 정확히 마주보았다.


"그들은 텅 빈 '그릇'만 보냈습니다. 하지만 나는... '데이터'(QET)를 탑재하고 있습니다. '스캔-삭제'는 메시지를 보내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하게 남은 수단입니다."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트라우마—깜빡이는 차임벨과 같던 '전송' 버튼—가 눈앞에 있었다.


[파일 검토: MEMORY_CHAPTER_4_TRAUMA.DAT] [분석: 472ms의 지연으로 인한 감각 오류. 원인 해결됨. 위협 요인 아님.]


그녀에게 '스캔-삭제'는 더 이상 스승을 잃은 비극도,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철학적 고뇌도 아니었다. 이제 '무선 통신'이 끊겼을 때 대체하기 위한 '유선 케이블'일 뿐, 지극히 논리적인 대안이었다.


"클라라! 제발! 그건 당신이 아니야!"


첸이 울부짖었다.


"저는 '클라라 림'이 아닙니다."


그녀는 포드 안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저는 '메시지'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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