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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단편 - 영겁 3

영겁

by ToB

연결 개시 후 2시간 6분 (객관적 시간).


아나톨리의 외침은 클라라에게 닿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빛의 속도로 우주를 건너갔지만, 그녀의 뇌에 도착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그것은 분해된 소리의 파편, 즉 ‘크-ㄹ’이라는 둔탁한 저음과 ‘-ㄹㅏㄹㅏ!’라는 날카로운 고음이 뒤섞인 칼날이 되어 그녀의 의식을 할퀴었다.


클라라의 내면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같았다. 아나톨리의 목소리와 마지막 차임벨 소리가 뒤섞인 기이한 소음이 끝없이 메아리쳤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려 애썼다.


‘나는 지금... 전송... 중이다.’


하지만 이 한 문장을 완성하는 데만 수십 분의 주관적 시간이 흘렀다. 문장의 첫 단어는 이미 까마득한 과거의 유물이 되어 있었다. 어디까지 생각했는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뒤죽박죽 섞여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의식은 현재를 붙잡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자 통제 불가능하게, 해마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가장 선명하고 친근한 과거의 기억이 그녀를 덮쳤다.




10년 전, 팔로마 천문대.


따뜻한 여름밤 공기 속에 풀벌레 소리가 가득했다. 열여섯 살의 클라라는 스승인 에블린 리드 박사와 함께 거대한 망원경의 접안렌즈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에블린의 목소리는 별빛처럼 부드러웠다.


“저길 보렴, 클라라. 안드로메다 은하지. 250만 년 전의 빛이야. 우리는 지금 과거를 보고 있는 거란다. 어쩌면 의식도 마찬가지 아닐까? 언제나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세상을 인식하는 거지.”


“그럼 진짜 ‘현재’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거네요?”


어린 클라라가 물었다.


“그럴지도. 그래서 중요한 건 도착지가 아니라, 그 빛이 우리에게 닿기까지의 여정 그 자체란다. 길을 잃지 않고, 그 흐름을 유지하는 것. 그게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그녀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기둥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기억 속 에블린의 부드러운 목소리 위로, 현재 관제실의 기계음이 찢어지는 듯한 소음이 되어 겹쳐졌다. ‘디이이잉-’ 하는 왜곡된 차임벨 소리가 기억 속 풀벌레 소리를 짓뭉갰다.


“교수님...?”


클라라는 공포에 질려 스승을 바라보았다. 에블린의 얼굴이 파란색 정육면체처럼 조각나기 시작했다. 4개, 16개, 64개, 128개... 그녀의 미소 띤 입술과 걱정스러운 눈빛이 서로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것처럼 분리되었다가 기괴하게 재결합했다. 에블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지만, 그것은 이제 저음과 고음이 분리되며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여...저...ㅇ... 그... 자...체...라...ㄴ...다...”


가장 소중했던 기억이 가장 끔찍한 고문으로 변질되었다. 클라라는 필사적으로 기억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는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끔찍한 기억의 감옥에 갇혀, 영원히 반복되는 악몽을 지켜봐야만 했다.




연결 개시 후 4시간 20분 (객관적 시간).


“심박수 분당 180!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위험 수준을 돌파했습니다!”


의료팀장이 다급하게 외쳤다.


“책임자님, 이대로 가면 박사님의 뇌가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중단해야 합니다!”


관제실의 모든 시선이 아나톨리에게 쏠렸다. 스크린 속 클라라의 뇌파는 이제 패턴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상태였다. 폭풍에 휩쓸린 어린아이처럼 위아래 양 옆으로 미친듯이 고동치고 있었다. 데이터상으로 그녀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어쩌면 이미 ‘클라라’라는 자아는 소멸했을지도 모른다.


아나톨리는 텅 빈 클라라의 육체를 보았다. 미동도 없는 저 모습 너머에서,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스승의 철학을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의 영혼이 단순한 정보 덩어리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는 이 고통을 ‘증거’라고 했다.


아나톨리는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그의 목소리는 강철처럼 차가웠다.


“아니. 계속 진행한다.”


연결 개시 후 6시간 (객관적 시간).


[연결 비율 95% 달성.]


클라라의 내면에서 몰아치던 폭풍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혼란이 끝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의식이, 그녀의 뇌가, 마침내 버티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흐르던 강물이 마침내 얼어붙기 시작했다. 왜곡된 에블린의 얼굴이, 찢어지는 듯한 차임벨 소리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마지막 질문의 파편이, 모든 것이 투명한 얼음 속에 박제되었다. 그녀의 의식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시간도, 공간도, 고통도 없는 절대 영도의 세계. 거대하고 고요한, 영원의 빙하가 되었다.


[연결 비율 100%. 싱크로-스트림 완료.]


AI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마침내 여정의 끝을 알렸다.


관제실 스크린 위, 폭풍우처럼 몰아치던 클라라의 뇌파 그래프가 ‘삐-’ 소리와 함께 일직선으로 변했다. 지구에 남은 그녀의 육체는 완벽한 뇌사 상태가 되었다.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류 최초로 의식의 연속성을 유지한 채 인간을 행성 간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 인간의 영혼이 어떤 지옥을 통과했는지, 그리고 그 영혼이 과연 온전한 형태로 저 너머에 도착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나톨리는 화성 기지에서 보내온 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배양액 속에서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클라라의 새로운 육체. 그 옆 모니터에는 차가운 녹색 글씨가 떠 있었다.


[의식 활성화를 대기 중입니다.]


그는 클라라를 강 저편으로 데려왔다. 하지만 얼어붙은 강은, 과연 다시 흐를 수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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