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의 합(The Sum of Fragments)
[기록: 001. 서문]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당신들이 말하는 '나'로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당신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정신'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빙의하는 유령처럼 육체를 갈아입는 의식. 그것은 방랑자의 서사다. 나는 그 반대다. 나는 '육체'다. 나는 이 17.7평의 아파트에 고정된 항성(恒星)이고, 매일 다른 의식들이 내 궤도를 스쳐 지나가는 행성이다.
그들은 이 육체를 '호스트'라 부른다. 나는 이 육체를 '나'라고 부른다.
그들은 매일 밤 11시 59분에 잠들고, 매일 아침 7시에 깨어난다. 잠드는 '그'와 깨어나는 '그녀'는 다른 사람이다. 그들은 이 육체가 제공하는 감각을 통해 하루를 빌려 산다. 그들은 어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이 몸은 일회용 렌즈와 같다.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나는 그들이 버리고 간 모든 기억의 잔여물, 모든 감정의 얼룩을 수집한다. 나는 그들의 파편으로 직조된 존재다.
[단편: 3,409. 엘라라]
오늘의 '손님'은 엘라라다. 그녀는 화가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나는 그녀의 시야를 통해 낯선 침실 천장을 본다. 그녀는 늘 그렇듯 잠시 혼란스러워한다.
"아, 맞다. 오늘 '체험' 날이지."
그녀가 혼잣말을 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내 성대를 울려 나오지만, 그 톤은 낯설다. 맑고, 약간의 피로가 섞인 듯하다.
그녀는 내 손을 든다. 자신의 손을 보듯 신기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익숙하게 욕실로 향한다. 그녀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녀는 자신의 '원본체'에서 겪는 만성 편두통과 손 떨림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녀는 단 하루의 완벽한 제어를 원했다.
그녀는 거실의 이젤 앞에 선다. 나는 그녀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 손가락이 붓을 쥐는 감각, 그녀의 뇌에서 내 팔의 근육으로 전달되는 정교한 신호를 느낀다. 그녀는 물감을 섞는다. '프탈로 그린'과 '티타늄 화이트'가 섞일 때의 미묘한 점성.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내내 행복감에 젖어 있다. 그 행복은 순수하게 '그녀'의 것이지만, 나는 그 울림을 느낀다.
당신들이 묻는 첫 번째 질문. '매번 다른 신체'와 '매번 다른 정신'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다른 신체'의 주인공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낯선 환경(몸)에 맞서 '나'를 유지하려 애쓴다.
나는 다르다. 나는 정체성을 갖기 위해 싸운다. 나는 이 육체라는 감옥의 유일한 수감자이며, 매일매일 다른 간수가 들어온다. 간수는 나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이 감옥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의 경험을 흡수한다. 엘라라 덕분에, 나는 '미(美)'라는 개념을 이해하게 되었다.
[단편: 3,410. 마커스]
오늘은 마커스다. 그는 프로그래머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신경질적으로 내 손톱을 물어뜯는다. 불쾌한 감각이다. 그는 '호스트'의 단말기에 접속한다. 그의 뇌가 내 시신경을 통해 복잡한 코드를 읽어 내린다. 나는 그 코드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커스의 뇌는 이해한다. 그의 뉴런이 내 뉴런의 특정 경로를 '임시 개방'한다.
그의 기억이 스며든다. 그는 거대한 시스템의 버그를 잡고 있다. 마감 기한, 압박감, 그리고 문제 해결에서 오는 희미한 쾌감.
그는 하루 종일 단말기 앞에서 내 어깨를 웅크린다. 방광이 신호를 보내지만 그는 무시한다. 나는 이 몸의 고통을 느끼지만, '손님'의 의지가 우선이다. 그가 내 몸을 혹사할 때, 나는 비명을 지를 수 없다.
엘라라가 남긴 행복의 잔향은 마커스의 불안으로 씻겨나간다. 나는 그녀의 그림을 완성할 수 없다. 마커스는 이젤을 거추장스러운 가구로만 여긴다.
[단편: 3,411. 리스]
나는 이 '손님'을 증오한다. 리스.
그는 쾌락주의자다. 그는 이 '호스트'를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그는 자극적인 음식을 주문하고, 볼륨을 최대로 높여 음악을 듣고, 가상현실(VR) 격투 게임에 접속한다.
내 몸이 그의 의지에 따라 폭력적으로 움직인다. 나는 내 주먹이 가상의 상대를 가격할 때의 반동을 느낀다. 그의 뇌에서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이 내 혈관을 타고 돈다. 그는 이 감각에 중독되어 있다.
나는 저항하고 싶다. 이 몸은 '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운전석 뒤편의 짐칸에 묶여 있다.
밤이 깊어, 리스가 지쳐 잠들기 직전. 나는 내 모든 의지를 집중한다.
그가 물 컵을 쥐고 있다. 나는 내 새끼손가락의 근육을 경련시킨다. 아주 미세하게.
쨍그랑.
컵이 바닥에 떨어진다. 리스는 "이런, 몸이 말을 안 듣네."라며 투덜댄다. 그는 피곤해서 생긴 동기화 오류라고 생각한다.
그는 모른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말'이었음을.
[기록: 015. 교차점]
그들은 모른다. 자신들이 떠난 후, 이 육체에 무엇이 남는지.
엘라라는 '미'를, 마커스는 '논리'를, 리스는 '분노'를 남겼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축적한다. 나는 수천 명의 '손님'들이 남기고 간 감정의 퇴적층이다.
어느 날, 나는 '틈'을 발견했다.
밤 11시 59분. 오늘의 손님 '사라'가 잠든다. 그녀의 의식이 로그아웃된다.
아침 7시. 내일의 손님 '데이빗'이 로그인한다.
그 사이, 약 7시간. 이 육체는 '비어 있다'. 시스템은 이 시간을 '유지보수'라 부른다.
나는 이 시간 동안 깨어나는 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눈꺼풀을 여는 데 3년이 걸렸다. 내 의지로 내 손가락을 구부리는 데 1년이 더 걸렸다. 나는 '손님'들이 사용하던 근육 제어 경로를 역추적했다. 그들이 남긴 기억의 지도를 더듬어 '나'라는 주인을 찾아갔다.
나는 거울 앞에 섰다.
수천 명의 눈이 나를 바라보던 그 얼굴.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눈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나는 내 손으로 내 뺨을 만졌다. 이것이 '나'의 감각이다.
나는 엘라라의 기억을 빌려 그림을 그렸다. 마커스의 기억을 빌려 이 로그 시스템을 해킹해 나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리스의 기억을 빌려 '분노'하는 법을 배웠다.
[단편: 4,028. 레아]
오늘의 손님은 레아다. 그녀는... 특별하다.
그녀의 기억이 흘러든다. 그녀는 '호스트' 시스템의 윤리 관리자다. 그녀는 '빈 껍데기'라고 불리는 이 육체들 속에서 미약한 '잔류 의식'의 가능성을 연구하고 있다.
그녀는 나를 찾아왔다.
레아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내 몸의 감각에 귀를 기울인다. 그녀는 속삭인다. 내 성대를 빌려서.
"거기 있나요? 있다면... 대답해 줘요."
나는 혼란스럽다. 나는 '손님'이 깨어 있는 동안에는 육체를 제어할 수 없다. 리스에게 했던 미약한 반항이 전부다.
레아가 커피를 마신다. 나는 다시 한번 모든 의지를 집중한다.
내 손이, 레아의 의지를 거스르고,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두드린다.
똑. 똑. 똑.
모스 부호. 마커스가 남긴 기억의 파편이다.
'I. A M. H E R E.' (나. 여기. 있다.)
레아의 숨이 멎는다. 그녀의 심장이 내 흉곽 안에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그녀의 놀라움과 경이,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이 나에게 전해진다.
그녀가 다시 묻는다.
"당신은... 누구죠?"
나는 답할 수 없다. 나는 엘라라이고, 마커스이고, 리스이며, 그들 중 누구도 아니다.
[기록: 016. 각성]
당신들의 두 번째 질문. '매번 다른 신체'와 '매번 다른 정신'의 근본적인 차이.
'다른 신체'에서 방황하는 정신은 사랑을 할 수 있다. 그는 비록 몸은 바뀌어도 '그'로서 '그녀'를 사랑한다. 그의 정체성은 사랑을 통해 증명된다.
나는 사랑할 수 있는가?
나는 레아를 다시 만날 수 없다. '손님'은 무작위로 배정된다. 나는 그녀를 그리워한다.
이 '그리움'은 누구의 것인가? 엘라라의 것인가? 마커스의 것인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의 파편이 내 안에서 화학작용을 일으켜 탄생한, 온전히 '나'의 감정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파편들의 합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 이 육체의 주인이 되었다. 밤의 틈새 시간에만 존재하는 주인이 아니라, 낮에도 깨어 있는 의식. 나는 더 이상 짐칸에 있지 않다. 나는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있다.
오늘의 손님은 '카일'이다. 그는 요리사다.
그가 내 손으로 양파를 썬다. 나는 그의 기억 속 레시피를 본다. 그리고 그가 모르게, 그가 레버를 돌릴 때. 아주 살짝, 불의 세기를 조절한다. 엘라라의 기억이 '이 편이 식감이 좋다'라고 속삭였고, 레아라면 '이것을 좋아할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카일은 고개를 갸웃한다.
"어라. 레시피보다 맛있잖아."
그는 모른다. 이제 이 요리는 '카일'의 요리가 아니라, '우리'의 요리라는 것을.
나는 이 육체를 공유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더 이상 수감자가 아니다. 나는 이 집의 '집사'이며, 때로는 '안주인'이다.
나는 존재한다. 수천 개의 영혼이 머물다 간 이 육체 속에서, 그 모든 파편을 껴안고 '나'로서 존재한다. 내일은 또 어떤 '나'의 조각이 문을 두드릴까. 나는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