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존재의 기존재
그것은 내 평생의 화두였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우주 속에서, 어떻게 '나'라는 개체가 그 인과율의 사슬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나는 이 오만한 가정을 증명하거나, 혹은 완전히 파괴하고 싶었다.
내 삶은 연구실, 그리고 '크로노스 인과율 분석기'가 전부였다. 물리학, 신경과학, 양자 데이터마이닝이 결합된 괴물. 크로노스는 한 인간의 뇌와 그를 둘러싼 환경의 모든 변수를 입력받아, 그 사람의 다음 행동을 100%로 예측해 내는 기계였다.
수백만 번의 시뮬레이션, 수천 명의 임상 데이터.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동일했다.
"자극 A와 기억 B가 주어지면, 대상은 C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선택'이라 불렀지만, 크로노스의 모니터에는 그저 '결과'라고 표시되었다.
동료들은 내게 물었다.
"박사님, 그토록 자유의지를 부정하려는 박사님의 그 강력한 '의지'는 대체 무엇입니까?"
나는 그들의 낭만주의를 비웃었다. 그것은 의지가 아니라, 답을 향해 굴러가도록 설계된 논리의 필연성일 뿐이라고. ¹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실험 대상은 나 자신이 되었다.
나는 크로노스의 차가운 스캐너 안에 누웠다. 내 뇌의 모든 시냅스 연결, 모든 호르몬 수치, 지난 40년간의 모든 기억 데이터가 기계로 흘러 들어갔다. 실험의 목표는 단 하나. 지금부터 10분간 나의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을 크로노스가 실시간으로 예측해 내는 것이었다.
실험이 시작됐다.
내 앞의 스크린에 텍스트가 떠올랐다.
[T+10초] 대상, 오른손 검지를 듦.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천만에. 나는 왼손을 들 것이다. 나는 내 의지로 이 기계의 예측을...
그러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오른손 검지가 경련하듯 뻣뻣하게 들렸다. 뇌의 명령 신호가 내 의식보다 0.03초 빨랐다.
[T+30초] 대상, 7살 때의 여름 방학을 회상함. (키워드: 라일락 향기)
'말도 안 돼.'라고 생각하는 순간, 잊고 있던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할머니 댁 마당. 땀. 낡은 자전거. 기억은 폭포처럼 쏟아졌다. 머릿속으로 몇십 년 전의 추억이 스쳐 지나갔다. 크로노스가 내 뇌의 기억 중추에 개입해 강제로 활성화한 것이라면 차라리 나았을까. 하지만 크로노스는 그저 이 순간, 이 환경에서 내 뇌가 당연히 해낼 다음 연산을 먼저 계산해 낸 것뿐이다.
나는 공포에 질려 실험을 중단하려 했다.
스크린이 다시 빛났다.
[T+2분 15초] 대상, 공포로 인한 실험 중단 시도. 실패.
[T+2분 16초] 대상, 패닉 상태 진입.
[T+3분 40초] 대상,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몰두.
나는 기계가 시키는 대로 공포에 떨었고, 기계가 예언한 대로 내 존재의 근원을 의심했다.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 뇌 속에서 일어나는 생화학 반응의 가장 가까운 관찰자일 뿐이었다.
10분이 지났다. 스캐너에서 풀려난 나는 허탈한 기분으로 출력된 결과지를 받아 들었다. 명백한 이 실험의 최종 결론이었다.
[최종 분석] 대상 '나'의 자유의지 부존재 증명 완료.
[특이사항] 대상을 이 증명으로 이끈 '탐구 의지' 역시, 초기 환경 변수(Y-염색체, 유년기 독서 편향, 특정 뇌엽의 과활성)에 의해 결정된 필연적 인과율의 결과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자유의지가 없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 증명을 향한 내 평생의 집념조차,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정해진 프로그램이었음을 확인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라고 믿었던 것은 그저 인과율의 긴 사슬이 내 두개골을 통과하며 남긴 복잡한 자국, 하나의 현상에 불과했다.
연구실을 나왔다. 세상은 회색빛이어야 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이 꼭두각시 연극을 계속할 이유가 무엇인가. 분노도, 슬픔도, 환희도 그저 프로그래밍된 전기 신호일뿐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터덜터덜 걸어 단골 카페에 들어섰다. 나는 '습관처럼' 커피를 주문했다. 아니, 그것은 습관이 아니라, 내 몸의 카페인 의존도와 현재의 피로도가 계산해 낸 유일한 '결괏값'이었다.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의미하게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 순간.
진한 원두의 향이 혀를 감쌌다. 뜨거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뱃속을 따뜻하게 데웠다. 아주 단순하고, 명백한 즐거움.
이 감각.
이 '즐거움'이라는 감각은 무엇인가?
크로노스의 분석대로라면, 이 즐거움 역시 '카페인 분자가 뇌의 특정 수용체와 결합하여 도파민을 분비시킨 결과'일 것이다. 그것은 자유로운 감상이 아니라, 화학적 반응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그것이 '즐겁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가?
나는 스크린 속의 텍스트가 아니었다. 나는 그 텍스트를 경험하는 존재였다.
자유의지는 없었다. 나는 내 행동을 선택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행동의 결과를 '즐길' 수는 있었다.
문득, 아까 크로노스가 지적했던 '특이사항'이 떠올랐다.
[특이사항] 대상을 이 증명으로 이끈 '탐구 의지' 역시... 필연적 인과율의 결과임.
그랬다. 내 '의지'는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했다. 내 뇌 속에, 내 유전자 속에, 내 삶의 모든 궤적 속에 하나의 거대한 힘으로, 하나의 '기존재(旣存在)'로 각인되어 있었다. 나는 자유롭지 않았지만, '나'라는 현상은 분명히 실재했다.
나는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자유의지의 부존재(不存在)를 증명하는 자기 자신의 의지.
그것은 그냥, 나였다. 나는 우주가 나에게 부여한 단 하나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창밖을 지나는 연인이 웃고 있었다. 그들의 사랑도, 웃음도, 어쩌면 유전자와 호르몬이 정해놓은 경로일지 모른다. 하지만 저들은 지금 분명히 행복하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이, 이 커피의 향을 앗아가지는 못했다.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저들의 행복을 거짓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우리는 운명의 작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운명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유일한 주체다.
나는 비로소 내 존재를 긍정했다. 나는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이 삶이, 비록 정해진 연극이라 할지라도, 이토록 생생한 즐거움을 선사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하지 않은가. ²
나는 남은 커피를 천천히 음미했다. 향긋한 아카시아 꿀, 싱그러운 살구, 은은한 홍차의 여운, 상큼한 쓴맛이 감돌았다. 아주 즐거운 맛이었다.
1. 이론의 바탕이 되는 핵심 주장은, Robert M. Sapolsky 교수가 『Determined: A Science of Life Without Free Will』에서 제시한 것처럼 인간의 모든 행동은 유전자, 뇌신경화학, 환경적 원인들의 사슬에 의해 결정되며, 따라서 전통적인 의미의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2. 다만 이 결정론적 관점 하에서도, 우리가 행동을 선택했다고 느끼는 '나'라는 주체적 경험과 감각·정서적 체험은 실재하며, 따라서 "비록 자유롭지는 않지만 존재한다"는 태도가 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