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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단편 - 이때 철수의 심정을 구하라

이때 철수의 심정을 구하라

by ToB

지구의 마지막 새벽, 하늘은 잿빛 매연 덩어리 같았다. 그 아래, 폐허가 된 도시의 뼈대 사이로 고독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이름은 철수. 그의 손에는 묵직한 레이저 총이 들려 있었다. 총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매끈하고 유기적인 형태. 마치 진화의 최종 단계에 도달한 연필 같았다. 물론 연필이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빛을 뿜어낼 리는 없었지만.


"자, 그럼... 해볼까."


철수는 중얼거렸다. 그의 눈앞에는 끝없이 뻗은,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기찻길이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지평선 위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거대한 실루엣이 보였다. 기차였다. 당연히 흔히 보던 평범한 기차가 아니었다. 초속 15킬로미터로 달려오는 기차. 인류 문명의 멸망을 촉발한 궁극의 재앙, '심판의 기관차'였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 모든 것은 물리학 교과서의 한 문제일 뿐이었다.


"지면에 정지해 있는 철수가 다가오는 기차를 향해 레이저를 쐈다. 철수가 보았을 때 빛의 속력은 30만 km/s로 일정하고, 기차의 속력은 지면에 대해 15 km/s로 일정하다. 이때 기차에 탄 사람이 측정한 철수가 쏜 레이저 빛의 속력은?"


당시 철수는 이 문제를 보며 코웃음을 쳤었다. '초속 15km? 그럼 기차가 오기도 전에 충격파로 지구가 박살 나겠네! 이딴 문제가 다 있어?' 그리고 정답이 '30만 km/s'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역시 아인슈타인. 참 쉽죠?'라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젠장, 그때는 그게 농담인 줄 알았다. 젠장, 그때는 그게 미래를 예언하는 문제일 줄은 몰랐다.


어느 날, 과학자들이 미친 실험을 했다. 우주에서 발견된 미지의 물질, '퀀터니움'을 이용해 무한동력 기관차를 만들겠다며 설치다가, 그만 기차의 속도를 통제 불능으로 만들고 만 것이다.


천천히 무궁화호 속도로 출발한 기차는 기어코 점점 빨라졌다. 결국 지금의 속도는 초속 15km. 그 속도는 기차 주변의 공기를 플라즈마로 만들고, 마찰열로 지면을 녹여버렸다. 기차가 지나간 자리에는 핵폭탄이 터진 듯한 폐허만 남았다. 인류는 속수무책이었다. 핵무기도, 미사일도, 그 어떤 첨단 무기도 초속 15km의 기차 앞에서는 고무망치 수준이었다.


정부와 과학자들은 절망했다. 그런데 그때, 한 물리학자가 교과서 구석에 박혀 있던 문제를 발견했다.


"기차에 탄 사람이 측정한 철수가 쏜 레이저 빛의 속력은?"


잠시 침묵하던 과학자가 중얼거렸다.


"... 빛의 속도는, 어떤 기준에서도 변하지 않아."


그의 눈빛이 서서히 불타올랐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야. 광속은 변하지 않지만, 에너지는 관성계마다 다르게 보인다. 기차가 초속 15km로 달리고 있다면, 그 안의 시공간은 상대적으로 왜곡돼 있을 거야. 우리가 쏘는 레이저의 에너지는 지면 기준에선 일정하지만, 기차 기준에서는 훨씬 더 높은 에너지로 보일 수도 있어."


"즉, 우리가 쏘는 '빛의 속도'는 같아도, 그 에너지 밀도가 다르게 작용한다는 거지. 그걸 이용하면… 기차의 양자 엔진에 간섭을 줄 수도 있어."


"말도 안 되는 가설이에요."


누군가 중얼거렸다.


"맞아. 하지만 지금은 말이 되는 게 하나도 없잖아."


정말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하지만 더 이상 말 되는 논리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구상의 모든 자원을 긁어모아 레이저 총이 만들어졌고, 이 레이저 총을 쏠 유일한 적임자를 찾는 회의가 열렸다. 수많은 특수부대 엘리트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이력서가 오갔지만, 서류를 검토하던 국방부 (아무튼 총이었으니까) 김 과장이 책상을 내리치며 일갈했다.


"자네, 교과서에 영희가 총을 쏜다는 말이 있었나? 없었잖나. 그래, 철수! 철수여야만 해!"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이름이 그 교과서 문제의 주인공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교과서적인 풀이법이었다.


"철수 씨, 당신만이 인류의 희망입니다."


대통령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철수는 '내가 왜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주변의 비장한 분위기에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훈련을 받았다. 지상에서 가장 빠른 기차가 다가올 때, 가장 정확하게 레이저를 발사하는 훈련. 물론 훈련은 성공적이었다. 될 때까지 했으니까. 철수는 지구 최고의 명사수가 되었다. 물론 지구에는 총을 쏠 수 있는 사람도 얼마 남지 않았다.


사실 훈련 때도 기차를 멈추지는 못했다. 훈련용 기차는 0.1km/s 정도의 속도였고, 그마저도 고작 몇 번의 레이저 발사로 박살이 났다. 어차피 진짜 기차는 한 번 쏘면 끝이었다.


이제 심판의 기관차가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웅장한 굉음이 고막을 찢고, 열기가 피부를 태웠다. 철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 하지만 그는 도망칠 수 없었다. 교과서 문제 속의 철수도 도망치지 않았다.


"젠장, 철수는 레이저를 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지."


철수는 비장하게 외쳤다. 사실 그가 살아남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의 몸이 플라즈마로 변하기 전에 레이저를 쏠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쉬이이이이익!


눈부신 섬광이 어둠을 갈랐다. 레이저가 기차의 전면부에 정확히 명중했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기차는... 아주 미세하게, 눈곱만큼 속도를 줄이는 듯 보였다. 기차 표면의 일부가 녹아내리며 엄청난 에너지 방출이 일어났고, 주변의 폐허만 의미 없이 한 번 더 박살 나버렸다.


"젠장! 역시 교과서 문제가 틀렸잖아!"


철수는 절규했다. 어찌 보면 교과서 속 세상이 현실과 다른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기차는 여전히 초속 15킬로미터로 그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찢겨나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가지 생각을 했다.


'혹시... 내가 쏜 레이저를 기차 안의 사람이 30만 km/s로 측정했다는 건, 기차가 멈췄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그 안의 사람에게도 똑같이 빛의 속도로 보였다는 의미였나...?'


철수의 몸이 섬광처럼 사라지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이 의문만이 가득했다. 그의 숭고한 삽질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심판의 기관차는 아무도 없는 황량한 지구를 초속 15킬로미터로 여전히 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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