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무도 읽지 않을 이야기

by 소소랍

사주를 보고 왔다. 이전에도 사주는 본 적이 두 번 있는데, 두 번 모두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었었다. 한 번은 매우 성공할 사주라고 했고, 두 번째는 정반대로 잘 되는 일도 없고 외로울 사주라고 했다. 내 생시가 가져오는 한자(?)들은 정해져 있던데, 사람마다 읽는 법이 극단으로 달라서 재밌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의 선박이 외로움의 섬에 닿을지, 매우 성공한 섬에 가 닿을지 내 삶의 여정을 흥미롭게 바라보았었다.


이번은 먼저 다녀온 남편에게 해준 이야기가 아주 현실적인 조언이었기에 나도 가보자고 해서 다녀온 것이다. 나는 두 사주의 극단 사이 어딘가를 부유하면서 살고 있는데, 그건 사주를 안 본 것과 동일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철학관이라면 극단 사이 어딘가를 좀 더 짚어주겠지,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사주는 현실적이어도 너무 현실적이어서 당황했다. 나는 물에 떠 있는 조그만 촛불같은 사주라, 큰 강과도 같은 딸에게 눌려 몇 년동안은 힘들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내 삶은 요즘 딸아이의 영어숙제 시키는 문제 때문에 아주 고되어서, 이번 철학관의 이야기가 허투루 들리지가 않았다. 그래서 '글로 큰 돈은 못 벌겠다'는 이야기가 아주 마음 깊은 곳에 콕, 하고 박힌 것이다. 아니 의사(?) 양반, 글쟁이가 꿈인 사람한테 글로 큰 돈은 못 번다니요.



초등학교 때, 학교에 다녀오면 삼남매 중에 나만 집에 있는 날이 간혹 있었다. 보통은 어린 동생이 집에 늘 있었고, 그렇지 않아도 언니와 같이 집에 있는 날이 많았다. 그러니 집에 혼자 돌아오는 날은 엄마를 독차지할 수 있어 아주 신나는 날이었다. 책가방을 방에 던져놓고 신문을 읽는 엄마 옆에 앉아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종알종알 떠들곤 했다. 그런 날들 중에 하루였다. 그날도 집에 나만 있어서 엄마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문득 알았다, 엄마가 듣지 않는 것을. 엄마는 신문기사에 정신이 팔려 내가 어떤 주어에 어떤 동사를 잇는지 잇지 않는지, 는 당연히 알지 못했고, 내가 갑자기 말을 멈추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그후로 엄마에게 학교일을 말하지 않았다. 내 삶이 엄마에게, 재미없어 읽지 않을 책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렇다, 내 삶이 재밌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막연한 기대일 뿐, 실제는 재밌는 이야기는 커녕 이야기가 되기도 어려운 것이 삶의 아주 흔한 양태다. <응답하라1994>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기적은 수많은 기적이 아닌 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소수의 이야기라는 느낌의 대사가 있었는데, 참 잔인한 대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맞는 말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재밌는 이야기라고 느끼는 것은, 그 바탕에 재미없는 이야기들과 이야기가 되지 못한 사건의 나열들을 깔고 있다. 내 삶이 재밌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같은 일이다. 내 삶이 기적이 되지 못하는 것이 확률적으로 더 당연하고, 현실적인 것이다.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나그네처럼 사는 것도 괜찮았다. 무료한 삶의 여정들을 '겪어나가는 것'도 누군가의 삶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서점엔 아주 재밌는 소설도 있지만 법전도 있고 옥편도 있지 않나. 매일 똑같은 시간을 지나는 기차 한 대를 기다리는 시골역이, 수많은 기차들이 지나는 서울역보다 많은 법이다. 빛나는 건 보석이어도 보석을 찾으려면 수백만 개의 돌이 깨져야 한다. 내가 그 돌임을 받아들여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가 '나도 괌에 놀러가고 싶다'고 하기 전까진, 시골역과 돌과 옥편의 삶도 받아들이기 나름이지, 버틸 만은 했다. 하지만 아이가 괌에 가고싶어하는 순간, 내가 그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진 순간, 내 시골역은 재개발을 기다리고, 내 흑연돌멩이는 누가 불이라도 쬐어주길 기대하기 시작하였다. 내 능력에 불이 붙어 어마어마하게 글을 잘 쓰고, 돈을 벌어서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어졌다. 누가 내 옥편에 나열된 한자들에도 기승전결이 있고 끝내 성공한다고 말해주었으면 했다.


그런데 철학관은 반대로 내 삶이 아주 큰 변화없이 그저 지금처럼 살 것이라고 말해준 것이다. 내 기승전결과 재개발이 아마도 내 삶에는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내 아이가 괌을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거길 갈 돈이 내 글에서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있지도 않았던 내 희망의 탄소원자 하나가 결합하지 못하고 연필심의 암흑 속으로 떨어졌다. 내 삶이 엄마의 신문 옆에서 말하기를 멈추었다.



방에 느지막히 누워있다가 아이의 숙제 때문에 거실로 불려나왔다. 혼내기, 구슬리기, 협박하기를 마치고 초콜릿으로 딜을 걸었다. 숙제를 마친 아이에게 예의를 가르치며 못다한 잔소리를 한다. 다 혼내고나면 극적인 화해의 시간이 찾아온다. 안아달라는 이만~한 덩치의 아이를 안고 눈을 맞추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럼 아이는 언제 짜증을 냈냐는듯 폭 안겨서 머리에 뽀뽀해주길 기다린다. 내가 아이 머리에 뽀뽀를 하면, 침묻는다며 꺄르르, 웃는다. 아이를 꽉 끌어안고 뽀뽀를 무한으로 발사하면 아이는 한참을 웃는다.


이 드라마는 희노애락을 다 준다. 불같이 화내게 했다가 물같이 감싸안고 흙처럼 품어내는 공기같은 사랑이다. 하루에 한 대 지나가는 기차역이 철도덕후를 만난 것 같다. 이 시골역에는 여전히 기차가 한 대만 지나가지만 내 모양새를 찍고 기록하고 관심가지는 사람이 있다. 구석에 쳐박힌 식물도감이 독자를 만난 기분이다. 내가 가진 식물의 설명이 그렇게도 재미있었나, 싶다. 내 연필심으로 귀여운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만난 기분이다. 내가 비록 반짝이는 보석이 되지 못했어도 나를 가지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가끔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의 배경의 구석을 본다. 이야기를 하는 배경은 오래 살았던 집인데 구석에 거미줄 하나 쳐있지 않기도 하고 물이 흐르는 동굴인데 천장에 물방울 하나 맺혀있지 않기도 한다. 힘든 영화를 볼 때 그런 깔끔함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안심을 준다. 내가 사는 집은, 연초에 대청소를 할 때 묵은 거미줄을 걷어내기도 하고 무늬가 예뻐 골랐던 벽지에 먼지가 조곤조곤 앉기도 한다. 나는 삶의 무늬가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삶을 구체적으로 만들고 삶을 삶답게 만드는 것은 그 사이사이에 있는 거미줄과 먼지들이다.


내 삶이 클림트의 그림처럼 화려하고 아름답고 모두가 주목하길 바랐지만, 실제 내 삶은 에곤쉴레의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고 무겁고 더러워 보인다. 일견 더럽고 아름다워보이지 않는 에곤쉴레의 그림이 사랑을 만났을 때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것처럼, 먼지, 거미줄과 같은 이 삶에도 의미는 있다. 화려하고 성공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삶이고 그렇지 않은 삶에도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나의 엄마도 아니고 나의 딸 또한 아니고 나 자신일 것이다. 물론, 나에겐 나라는 책을 아름답고 재밌는 이야기로 읽어주는 독자가 있기에 쓰고 의미를 발견할 힘을 낼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아무도 읽지 않을 이야기를 쓴다. 거미줄과 먼지같이 재밌는 이야기에서는 삭제될 조용한 나열들을. 먼훗날 내 삶을 마쳤을 때, 그 속에 겪어내야할 주제 하나는 분명히 보이길 바라며.



2024.10.27

나라는 책을 읽어주러 오신 분들 감사해요.
















keyword
이전 10화틀림과 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