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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과 다름

by 소소랍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가. 서울로 전학을 갔더랬다. 전학을 가서 처음 앉은 자리엔 짝궁이 있었는데, 장애인인 친구였다. 나는 말도 못하고 내 지우개를 자꾸 뺏는 그 친구가 싫어서 울었는데, 그 날부터 담임선생님의 따돌림이 시작되었다. 장애인 친구를 챙겨주고 배려해줘야 하는데, 옆자리 싫다고 자리 바꿔달라고 하는 것은 매우 이기적인 성격이라고 온 반 아이들 앞에서 말했었다. 그리고는 이기적인 성격을 고치려면 계속 장애인 친구와 짝궁을 해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벌처럼 1년내내 그 친구와 짝궁을 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친구는 정신지체였던 것 같다. 거동은 정상이었지만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부분은 관심도 있고 얼추 잘 해내어서, 어린 생각에도 이 친구를 함부로 대하면 안되겠다, 는 생각을 했던 게 기억난다. 그 친구는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책상에 침을 흘리고는 했는데, 가운데 금을 그어놓고 그 금을 넘어오지 말라고 해도 자꾸 넘어와서 내 지우개를 가져가곤 했다. 당시엔 짝궁이 전부인 세상이었는데, 짝궁이 말도 못알아듣는, 그것도 날 괴롭히는 남자애라는 게 너무 싫었다. 너무 싫었지만 옆자리 앉다보니 익숙해지고 그 친구도 날 친하게 여겨서, 나중엔 싫다고 말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 담임은 1년을 나를 벌을 세우고도 모자라서 학생기록부(라떼;;)에 내가 이기적인 성격이라고 기록을 남겼다. 그 1년간 나는 난생처음 내가 못된 사람,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가둬진 경험을 했다. 부모님께 - 말했어도 뭐 특별히 제스쳐를 취하진 않으셨을테지만- 말도 못하고 매일 '장애인 옆자리'라 이름 붙여진 교화소로 등교해야 했다. 그 선생님은 장애인을 배려하라고 가르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저변에 깔린 마인드에는 장애인은 일반적인 인간과는 '틀리다'는 경계선이 있었고, 그 경계선 너머로 가는 것은 벌이라고 정해두셨다. 경계선 이 쪽의 좁은 정상성의 범주의 '선함'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악함의 딱지를 얹고 내몰렸다.


지금 생각하면 꼴랑 4학년한테 뭐그리 악감정이 있어서 한번 잘못했다고 1년을 벌을 주더니 끝내 기록에도 남기는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 선생은 그래도 때리진 않았으니 누군가에게는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에 남아 지금은 정년퇴임을 했을 것이다. 나는 몇십년이 지나도 잊지 못해서 어제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딸에게 이야기 했는데.


아이의 반에 ADHD를 가진 아이가 있다. 장애인 친구도 있는데, 아이는 어린이집부터 장애 통합반이어서 장애인 친구는 그 친구가 무슨 '장애'를 가졌냐며 의아해 할 정도로 경계가 없다. 문제는 ADHD인데.., 원래 ADHD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불안장애와 강박이 있어서 자신이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시험을 보다가 갑자기 모르겠다고 소리지르며 울면서 시험지를 찢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면 욕을 하고 말리는 선생님을 때리고 욕을 한단다. 어제는 그 아이가 내 딸을 비롯한 여러명의 아이들에게 '뭘봐 ㄱㅅ끼들아'라고 했다고 자기 전에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심난해진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에 장애에 대해 처음 인지를 하고, 그 후에도 여러 일을 겪으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장애 또한 '다름'의 스펙트럼 안에 있다는 것이다. 4학년 때 짝궁이었던 그 친구는 지능의 발달이 좀 느린 것이었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키가 좀 작은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정상'이라는 범주 안에도 공감능력이 심하게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고, 아주 극적인 방향이 아니더라도 사람마다 생김새도, 잘하는 일도, 못하는 일의 못하는 정도도, 다 다르게 마련이다. 생각보다 극적으로 못하지만 일반인의 범주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나도 오른쪽 다리가 왼다리보다 2센치 정도 짧고 오른쪽 눈썹이 왼쪽 눈썹보다 위에 있지만 극단에 있지 않아서 일반인이라 불리는 스펙트럼에서 살아간다. 강박과 난독으로 학교교육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일반인'도 알고 있다. 일반인의 스펙트럼과 장애의 스펙트럼의 경계는 생각보다 두텁고 뚜렷하지 않다.


그런데 ADHD는 다양성의 범주로 '이해'는 가능하나 그 폭력성(이 있을 경우)의 피해까지 감싸안기는 무리가 있다. 내 딸은 수업시간에 앉는 자세 하나도 조심하는, 그야말로 '초등학교'는 '올바름'을 배우는 공간으로 알고 있는데, 그 속에서 한 친구는 계속 올바름을 깨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재당하지 않거나 제재될 수 없는 것을 끊임없이 목격하고 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 친구는 손으로 맞고, 한 친구는 물건을 던져서 맞았으며, 대다수의 아이들은 '욕'을 먹는 등, 그아이가 절제하지 못하고 내지르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모두 그 친구가 모르는 문제가 있었다는, 그 사실 하나 때문에 생긴 일이다.


나는 그 아이를 틀림의 영역에 놓고 내 아이에게 '피하라'고 말해야 하나? 그럼 내 어린 시절의 담임과 무엇이 다른가? 어린 아이의 무의식에 생길 수 있는 좁은 범위의 '정상'의 개념이 가져올 폭력성은 내가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나.


어제 밤 졸지에 강아지들 중 한 마리가 되어서 온, 올바름을 추구하는 내 아이에게, 나는 그저 그 아이가 가진 아픔이라고 말해줄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말이 조금 느릴 뿐인 것이고, 누군가는 정돈된 걸 좀 더 많이 좋아할 뿐이고, 다만 그 뿐인 다양한 아이들 속에서 살아가는 거라고 ㅇㅇ도 다른 사람과 다르게 생겼고 다른 성격을 가졌듯이. 그러면서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선생님 얘기를 해주었다. 그 아이가 피해를 준다면 ㅇㅇ가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그 아이가 친해지지 않을 거 같으면 피하는 게 나쁜 건 아니란다, 하고 말이다. 그 아이와 ADHD 전체를 경계짓지 않고 그 아이가 주는 폭력만을 피하는 방법을 아이가 알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듣더니 아이가 말한다. 그 선생님 땜에 엄마가 많이 슬펐냐고, ㅇㅇ가 안아줄게, 이제 슬퍼하지마, 하고.


나는 ADHD인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논리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아이는 내 감정에 집중해서 날 안아주더라. 엄마는 이기적(이라는 게 뭐야? 라고 먼저 묻긴 했다)인게 아니야, 엄마는 친하지 않아서 싫었던 거잖아, 하는데.


그래. ADHD 가진 아이를 이리저리 재단하는 게 뭐가 중요한가.


중요한 건 어떤 이유로든 다쳐서 온 아이를 '너의 잘못이 아니다'하고 안아줄 수 있는 사랑이 아닌가. 아이가 내게 그랬듯이.



2024.04.25

블로그에 쓴 글을 약간 퇴고.


- 다행히 선생님의 태도는 공정한 느낌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 같을 순 없겠지.

- ADHD인 아이의 부모 마음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보다 공론화해서 교육지원이 더 잘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장애가 있는 초등학생은 보조교사가 일대일로 붙는 것 같던데, ADHD는 그런 것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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