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나게 그리운 친구를 기억하며
벌써 몇 년인가
그 녀석 빈자리
뭘로 채울지
어제도 친구들 모여
허술한 네 녀석
느린 말투 기억하고
기타 잡고 놀던 호기
목소리도 생생한데
같이 부르던 노래 슬프다
친구야 어디 있니?
네 놈 간 뒤 우리는
너무 재미없다
쓸데없이 착하던 너
음악 자랑질 좋아하던 너
어디 한번 와서 해봐라
그간 일 없이 지냈을 터니
기타 솜씨 늘었겠다
나는 요즘 형편없다
네 얼굴 못 봐도
네 노래 못 들어도
네가 남긴 자리
우리 기억 속에 고스란히
맘속 깊이 품었으니
우리끼리 놀았다고
행여 섭섭해 말고
편히 지내라
네가 떠난 자리에
산다 우리가
너의 기억 간직하고
오늘도
노년이 되면,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한 두 명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안 좋은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내 인생의 절친들 대부분이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때의 친구가 질병 후유증으로, 간암으로,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친구들의 부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황당하고, 어이없고, 슬프고, 나는 무슨 행운으로 살아남아 있을까 죄스럽기까지 합니다.
그중 나와 음악을 같이 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노래를 같이 했고, 중창단을 만들어 공연도 했고, 결국에는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해서 본선무대에 서보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는 기타를 잘 쳤습니다. 그 당시 인기 있던 트윈폴리오의 송창식 같은 느낌이었고, 저는 윤형주를 더 좋아했습니다. 우리 둘은 화음이 너무 잘 맞았습니다. 성격은 반대였지만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었습니다.
그 친구는 나중에 한의사가 되었고, 저는 대학에서 교직을 갖게 되었습니다. 대학생 시절, 그 친구는 내가 몰래 내주었던 회비로 수련회를 다녀왔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 선교단체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결국은 뒤늦게 목사안수를 받고 서울 어느 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40대의 나이에 간암으로 죽을 고비를 겪었지만 신앙의 힘으로 살아난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목사 취임예배 때 흩어져 살던 고등학교 동창들이 모여 마지막으로 남성 4 중창을 축하특송으로 불렀습니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 추억입니다.
지금까지도 그 녀석과 같이 노래하며 알게 된 옛 친구들을 만납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 친구를 그리워합니다. 그 친구의 착하디 착한 행적이 다른 친구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었습니다. 나는 그 친구의 목소리와, 같이 만들어 내던 화음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지금 살아있다면 아마도 팀을 만들어 7080 음악시장에 다시 도전하자고 할 친구입니다.
나는 그 친구가 마지막 병석에서 내 얼굴 한번 보고 싶다고 전화했을 때 바빠서 가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친구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주에 방문하겠다고 전화했을 때, 그 친구는 이미 병이 악화되어 나를 볼 기운조차 없다고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는 힘없는 그의 전화 목소리를 듣고도, 설마 했습니다. 그 친구는 그렇게 나와 이별했습니다.
지금도 그 친구는 내 삶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녀석이 잘 치던 기타만큼 저도 잘 쳐보려고 연습 중입니다. 그 친구와 같이 불렀던 노래도 다시 불러서 동영상 기록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그 녀석을 기억하는 친구들과의 인연도 아마 죽을 때까지 계속 갈 거 같습니다. 좋은 기억만을 남겨주고 간 그 친구가 너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