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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세상 진입기

알코올 오르가슴

by 김정룡

소주와 마주 앉는다


병과 잔이 탁자에 부딪히며

새로운 세계의 문을 노크한다


뚜껑의 파열음과 투명한 유체음이

새로운 여정을 위한 팡파르가 된다


냉장고 속에 있던 유리병의 냉기는

무뎌진 손끝을 깜짝 깨운다


떨꺽 소리와 함께 화구가 작동하고

찌개가 끓기 시작하면


침샘은 이미

따뜻한 첫 수저의 맛을 기다린다

오늘따라 첫 잔은

옛 포장마차의 기억을 불러온다


마주친 술잔은 입술을 적시고

첫 목 넘김은 조여졌던 나사를 푼다


나는 잠시 술의 초청에 응한다


컴퓨터 없이 경험하는

아날로그식 가상 세계이다


작은 웃음이 크게 들리고

큰 슬픔이 작아진다


근심으로 무거워진 어깨의 짐도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몇 잔 째 인지 세지 못하는 순간

가상의 행복이 현실의 행복이 된다


외로움도 잊힌다


너무 취해 술 깬 뒤 현타 오지 않을 정도면

완벽한 쾌락을 누려도 좋다


이 시간만은

마약성 진통제를 즐겨도 된다


알코올이 온 신경을 잠재운다


그렇게 나는

술 취한 세상으로

점점

기분 좋게 들어간다



소주라는 것은 독특한 정서를 담고 있다. 서민의 술이기도 하지만, 인생의 술이라고 하면 소주가 제격이다. 요즈음엔 칵테일 같이 맛있는 술도 있지만, 술 다운 술은 소주이다. 인생이 쓰면 소주가 쓰고, 인생이 달면 소주도 달아진다. 같은 알코올 도수와 첨가물을 가진 술인데, 기분에 따라 다른 맛이 나는 게 신기하다.

술을 마시는 과정은 술집의 분위기에서 시작된다. 포차 공간의 술집에 들어가면 늘 중년의 주인장이 손님을 맞는다. 실내에는 냉장고가 고, 반짝거리는 술병들로 가득 차 있다. 그 가운데 소주가 있다. 주변 테이블의 어수선함과 소음은 필수 배경음이다. 잠시 후 안주와 소주가 테이블에 배달되면 파티가 시작된다.


소주 뚜껑이 열리는 소리, 잔을 따르는 소리, 소주잔이 부딪치는 소리, 이 모두가 첫 잔을 위한 전주곡이다. 빈속에 마신 소주는 식전주의 역할로도 훌륭하다. 그뿐 아니라 빈속에 첫 잔은 일상의 고단함을 잠재우는 안식주이고, 앞에 앉은 친구와의 벽을 허무는 대화주이기도 하다. 그래서 첫 잔을 마시기까지의 의식 절차가 매우 중요하다. 이 모든 과정을 눈으로 귀로 몸으로 느끼면서 첫 잔을 맞이한다.

첫 번째 목 넘김이 기분 좋게 수행되면, 취기의 클라이맥스를 향한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알코올은 신경을 살짝 이완시키고, 인생의 고뇌가 흐릿해진다. 정부가 허락한 마약성 진통제의 효과가 발휘된다. 약효가 항상 보장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술의 초대에 조금만 마음을 허락하면, 예외 없이 올라오는 취기로 기분이 몽골 몽골 해진다. 아직은 만취하지 않았지만, 생각이 단순해지는 상태에 도달한다. 진정한 클라이맥스에 가까이 왔다는 사인이다. 이때는 반드시 좋은 친구와 분위기가 필요하다. 잔을 부딪쳐야 하고, 평소보다 많이 마셔야 한다. 그래야 술 취한 세상의 엑스터시를 경험할 수 있다.


취기는 우리에게 가상 행복을 준다. 이 상태를 한 시간 이상 유지할 수 있다면, 투자한 시간과 마신 알코올의 양에 비해 엄청난 가성비를 누리는 셈이다. 술 취한 세상이 주는 최고의 복지 혜택이다. 술은 배신이 없다. 마신만큼, 마실 때 열어 논 내 마음만큼, 나를 찐 행복하게 만든다.


행복감이 필요한 아저씨들에게 소주가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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