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와 소년

소년을 잃어가는 아저씨의 일상

by 김정룡

Nov 25. 2024

아저씨는 소년이었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사춘기의 벅차고 당황스럽던

격정의 순간들을 지나왔다

속 안에서 꾸물꾸물 올라오는

남성의 기운에 당황하며

죄의식에 움츠러들기도 하고

버스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학생의 샴푸향에

종일 풋풋한 만남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 소년이 어느새

아저씨가 되었다

소년을 아저씨로 만든 것은

무자비한 세월

먹여 살려야 하는 식구

눈치 봐야 하는 상사

경쟁사회가 만든 열등감

차오르지 않는 통장 잔고

이 모든 것이 아저씨를 만들었다

그 아저씨가 점심 한 끼 때우려

국밥 그릇과 마주 앉는다

자신의 지친 모습 누가 볼세라

최대한 웅크려

얼굴을 밥그릇에 묻는다

허리라도 곧게 펴고

당당하게 밥 먹으려면

오전 업무가 깔끔히 처리됐어야 하고

아파트 중도금 납입이 완료 됐어야 하고

내년엔 승진이 기대되어야 한다

순간 스쳐가는 아주머니의 화장품 내가

그의 후각을 깜짝 깨운다

그 순간

잊혔던 여학생과

그녀의 샴푸 향이

기억 속에 떠오른다

잠시 꿈을 꾼다

그 예쁜 소녀는 아내가 되고

멋진 차에 애들과 짐을 가득 싣고

여행을 떠난다

대기업 중견간부인 나는

멋진 바에 앉아

수십억 계약을 마무리하고

위스키 잔을 부딪히며

여유 있는 웃음 짓는다

바바리를 날리며

적들을 물리치는 주윤발처럼

쿨한 누아르 영화의 주인공도 된다

수 초간의 상상이

국밥 그릇 긁는 소리와 함께

막을 내린다

삐걱거리는 의자를 밀어내고

종종걸음으로 계산대를 향한다

살아내야 하는 하루가

그 소년을 순식간에 지워버린다

그렇게 아저씨는

오늘을 산다

나는 출퇴근 길이 멀다. 1시간 반에서 2시간까지 걸리는 출퇴근길이기에, 종종 휴게소에 들른다. 지방 고속도로 휴게소여서 그런지 가족들이나 여행객보다는 업무로 운전을 해야 하는 중년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4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남자들이 식사를 한다.

어느 날, 그들 모두가 똑같은 자세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혼자서, 허리를 굽히고, 밥그릇과 옆의 스마트폰에만 집중한다. 마치 배식받은 교도소의 수감자들처럼, 소리 없이, 저항 없이 주어진 밥을 먹고 있었다. 그들이 살아내야 할 삶의 무게가 그 장면에 담겨 있었다.

그들이 식사를 하면서 어떤 기분인지, 무엇을 상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장면이 생활고에 지친 아저씨들의 무미건조한 배식 시간이 되는 게 싫었다. 몇 초만이라도 잠자고 있던 소년의 기억이 살아나고, 그 아련한 추억에 빠져 혼자 미소 짓는, 그런 식사시간이 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