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자기 계발서와 심리책을 읽던 날이었다.
어떤 날은 마음에 들었던 문장이
또 어떤 날은 공격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나를 위로하기보다
‘이것이 정답이니 이렇게 해라’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때면 도망치듯 소설을 집어 들었다.
소설은 나를 꾸짖지 않았다.
가르치려 들지도 않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마음 한 자락을
어루만지는 문장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문장들이 뚫린 마음 한 구석을 메워주었다.
그날도, 모든 문장이 싫었던 날이었다.
위로받고 싶어서
현실과 아주 다른 판타지 책을 펼쳤다.
정말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던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내가 붙잡고 있던 트라우마와
마주하게 해 줄 줄은 몰랐다.
나와의 대화는 이토록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퇴사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여전히 회사 사무실에 앉아 있는 꿈을 꾼다.
똑같은 자리. 똑같은 모니터.
하지만 누구와도 말하지 못한 채
그저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다.
그러다 어떤 사건에 휘말린다.
오해받을 만한 상황인데도 아무 말도 못한다.
억울한 마음이 차오르지만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간신히 꺼낸 말도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깨어난다.
현실의 나는 그 자리에 없지만,
내 마음 어딘가엔
아직도 그 자리가 남아 있는 것 같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1』에도
나와 같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꿈속에서 같은 장면을 반복해 꾸는 사람들.
결국 달러구트를 찾아가 묻는다.
“왜 이런 꿈을 꾸어야 하죠?”
달러구트는 조용히
계약서를 꺼내 보여준다.
그 꿈을 끝내기 위해선 해당 트라우마를
괴롭지 않게 떠올릴 수 있어야 하며,
긍정적인 감정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고.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마음속 어딘가에서 뚝— 하고
오래된 감정이 떨어져 나갔다.
20대의 회사 생활은 내게 ‘생존’의 다른 말이었다.
같은 팀 선배는
기분에 따라 업무 공유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차가운 공기를 메우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애써 웃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는 나는
그 선배의 기분을 맞춰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동기였던 후배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실질적인 리더였다.
어린 선배와 어린 리더 사이에서
나는 샌드위치가 된 기분이었다.
하루 종일 말을 하지 않는 선배.
내 말 한마디에 새초롬한 표정을 짓는 동기.
그런 날이면 나는
‘지금 나만 따돌림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뭘 잘못했나’ 스스로를 의심했다.
혼자 상상하고, 혼자 눈치 보며,
하루를 견뎠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웃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애썼던 방식이었지만
나중에는 그런 내 모습을 나조차 미워하게 되었다.
‘찌질하다.’
‘쪼다 같은 게.’
가장 잔인한 말은
언제나 내가 나에게 건넨 것이었다.
그때, 달러구트는 말했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거꾸로 생각하면
온 힘을 다해 어려움을 헤쳐 나가던 때일지도 모르죠.
이미 지나온 이상,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랍니다.
그런 시간을 지나
이렇게 건재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손님들께서 강하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 이미예, 『달러구트 꿈 백화점』, p.144
나는 찌질한 쪼다가 아니었다.
그땐 그게 내 최선이었다.
그건 비겁함이 아니라
살기 위해 애쓴 방식이었다.
그런 나 자신을 내가 외면해 버리면
내 안의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숨을 못 쉬게 만든 건
나 자신인 것 같아 눈물이 났다.
그 문장 하나가,
내가 오래도록 붙잡고 있었던
스스로에 대한 미움을
조금씩 내려놓게 해 주었다.
내게 닿은 첫 화해의 손길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지나가는 책,
오래 머물지 않을 문장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단 한 번도 꺼내지 못했던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