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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손을 내밀기까지

by 예린

책이 내게 말을 걸어온 이후,

오랫동안 외면했던 마음의 소리가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내 안의 나와 처음 마주한 그날을

잊고 싶지 않아서

더 열심히 문장을 그러모았다.


어떤 날은 밑줄을 열심히 그었는데도

왜 마음에 닿았는지 알 수 없었다.

더 빨리 변하고 싶고,

더 잘 살고 싶어서 조바심이 났다.


소설로 대화를 시작했지만,

계속 소설만 읽어도 괜찮은 건지 망설여졌다.

그래서 자기 계발서, 심리서, 에세이까지

여러 장르를 기웃거렸다.

그렇게 모은 문장들이

조금씩 내 안에 쌓여갔다.


문장은 물건과 달라

아무리 많이 쌓아도 무겁지 않았다.

쌓이면 쌓일수록,

오히려 나에게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내 마음에 닿는 다리가

하나둘 놓여가는 것 같았다.


문장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스쳐 지나간 문장과

붙들고 싶은 문장을 바라보았다.


밑줄까지 그었는데,

왜 그었는지 모를 문장도 많았다.

당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딘가 마음을 툭—하고 건드린 건 분명했다.

그 문장은 시간이 걸려도

언젠가는 내게 대답을 건네주었다.


그중엔 오랫동안 아낀 문장이 있다.

처음 마주한 그 순간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문장.

아마도 평생 동안 꺼내보며

매만지게 될 문장.


그 문장을 읽은 그날,

마음 한구석에 짓눌려있던 무언가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 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최은영, 『밝은 밤』


나는 눈물과 콧물을 훔칠 겨를도 없이 울었다.

그 문장 속 ‘그 애’는,

내가 외면해 왔던 바로 나였다.


억지로 웃고, 괜찮은 척하던 날들.

무시당해도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했던 순간들.

그때 내 안의 나는

얼마나 자주, 얼마나 크게

도움을 요청했을까.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는 그 감각.

그건 몸보다 먼저,

마음이 보내온 구조 신호였다.


이 문장을 만난 이후,

나는 내 안의 작은 목소리를

조금 더 잘 듣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서툴고 어렵다.

모진 말을 먼저 꺼내는 날도 많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그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내가 내 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언젠가,

내 안의 목소리와 내가

조금 더 닮아 있기를 바란다.

조금 더 내 마음의 손을 들어주기를 바란다.

나를 안아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미안하지 않기를,

삶이 조금 더 다정해지기를 바란다.


예전엔 빼곡한 책장을 서성이며

수많은 인생들 앞에 막막했다.

남들이 좋다하는 책이 낯설었다.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몰라 불안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수많은 책 앞에 서있으면

정답인 인생은 없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해진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기다린다.

필사해 둔 문장을 다시 펼쳐 읽는다.

문장은 내안의 나를 이루고

조금 더 잘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내가 나에게 조용히 손을 내미는 것에서 부터

삶은 숨쉬기 시작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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