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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joo Oct 20. 2024

Ep.01_No I can do it.

5세의 최선

   첫 영어 조기교육 시기가 점점 빨라진다고는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평범한 5살 어린이들에게 영어란 아직 너무나 새롭고 벅찬 무언가이다.      

부정확한 발음일지라도 나의 말을 대부분 이해하고, 열광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던 가족 혹은 어린이집 선생님들과 달리 이곳, 어학원에서는 '문맹'의 상황을 겪으며 인생의 쓴맛을 난생처음 경험하게 된다.      

'언어'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언어를 사용해야만 선생님들과 소통을 할 수 있는 상황은 대개 아이들에게 쉽지 않다.     

     

영어는 고사하고, 한국어로도 기본적인 일상생활 속 자기표현이 쉽지 않은 아이들에게 yes, no부터 알려주기 시작한다.      

3~4월의 전쟁 같은 신학기가 지나가며 점점 더 다양한 표현을 알려주는데 그중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을 외치게 되는 마법의 문장, "You can do it!"이 있다.     

알파벳 따라 쓰기가 너무 어렵고, 복잡한 영어 발음을 따라 하기가 싫더라도 이 마법의 문장, "You can do it!"을 외쳐주면 다시 한번 더 마지못해 도전해 주는 순수하고 고마운 5살 영혼들이다. 물론, 저 문장에는 4개의 짧고 단순한 단어들의 나열 외에도 선생님의 간절하게 응원하는 마음과 최소 '솔' 이상 되는 높은 톤, 앞니 8개 이상 보이는 환한 미소, 그리고 양손을 불끈 쥐어 두 팔을 높이 들었다가 내리는 힘찬 액션이 필수 옵션이다.      


내가 신나게 "You can do it!"을 외치는 횟수만큼 우리 아이들은 점점 더 유창하게 "Help me, Please."를 말한다. 물론 아이들의 필수 옵션도 늘어간다. 눈썹은 팔 자(八)여야 하고, 입꼬리는 살짝 아래로, 연필을 든 손에는 힘이 하나도 없다. 핵심은 선생님을 쳐다보는 <장화 신은 고양이>의 고양이 눈이다.     


안쓰러운 마음도 들지만, 나는 아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고 이 어려운 순간을 이겨내어 결국에는 영어를 잘하게 되는 순간을 만들어줘야 하는 선생님이기에     

"Help me, Please."로 간청할 때마다, 조금 더 오버스러운 옵션과 함께 누구보다 씩씩하게 마법의 문장을 한 번 더 외치며 용기를 북돋아 준다.      

     

어느 날, 우리 반 귀염둥이 J가 눈썹이 또 한껏 팔자 모양이 되어 나만이 할 수 있었던 마법의 문장을 응용하여 입을 뗐다.     

     

"NO I CAN DO IT."      


구슬픈 이 문장을 듣자마자 J에게는 미안하지만, 잠시동안 나 혼자 감격의 순간을 만끽하며 기뻐했다.  

5살 인생에게는 꽤 쓰디쓴 역경의 순간이었겠지만,

나에게는 너무 대견하고, 감격스럽고, 귀엽고, 웃기고, 무엇보다 내 직업의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끝없이 영어로 물어봐도 한결같이 한국어로만 대답해 주었던 우리 J가 영어 문장으로 대답을 하기까지 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     

비록 문법이 맞지 않더라도 그동안 나에게 숱하게 들었던 그 한 문장과 본인이 알고 있는 'NO'라는 한 단어를 합쳐 하나의 문장으로 입 밖으로 뱉어준 이 순간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감격스럽게 반가웠다.          

J는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한 순간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이미 그 아이는 스스로 최선을 다해 '영어 문장 말하기'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첫 순간이었다.       


직업을 가질 만큼 나이를 먹어버린 나에게도 '나는 못 해.'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들이 여전히 숱하게 많이 있다. 하지만, 고민하고 주저하다가 결국 그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다. 직장, 가족, 인간관계 등 나를 둘러싼 이 환경에서, 내 사람들에게 그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그 말을 꿀꺽 삼키곤 한다. 

그럼에도 "No I can do it."이라고 말하는 5살 우리 반 J처럼 '못한다고 말하기'를 성공하는 순간들이 있다. 

    

도저히 나는 할 수 없다고 나의 목소리 내어 말하는 행위를 이미 성공한 것이다.      

말없이 눈물 흘리지 않고, 못 본 척 외면하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앓지 않고,      

나의 목소리를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행위를 성공한 것이다.     

그 표현이 완벽하지 않고, 유창하지 않고, 멋져 보이지 않더라도 그 행위 자체도로 성공은 성공이다.     

     

그리고 이 성공의 순간까지는 내가 무수히 연습하고 노력했던 갈고닦은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와 결심, 그동안 수없이 반복한 경험과 연습, 그것들을 모두 종합하여 응용할 수 있는 나의 실력이 있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한 후에야 마침내 목소리 내어 입 밖으로 뱉을 수 있는 말,     

"NO I CAN DO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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