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2_오이반
Cucumber class 아님!
내가 근무하고 있는 우리 어학원은 반 이름들을 아이들이 쉽게 발음할 수 있고 인기 많은 과일들로 지었다.
그리고 우리 반에는 나이에 비해 한국어 발음이 살짝 서툴고 speaking이 아직 터지지 않은 남자친구 L이 있다.
알파벳 ABC도 몰랐던 6세에 입학해, 1학기가 지나고 2학기 중반 정도가 되면, 비교적 비슷한 대화 패턴이 반복되는 수업 시간 내에서는 영어 100퍼센트 수업이 가능해진다. 완벽한 문법은 아니어도 영어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고, 간단한 농담도 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 아이들과의 호흡도 척척 맞아 수업을 하는 나도 더욱 신이 나고, 그동안 열심히 성장한 소중한 내 새끼들을 대견해하며 보다 열정적으로 수업을 진행하게 된다.
우리 반 아이들과 한참 영어로 신나게 대화를 나누던 도중,
갑자기 L의 급발진하는 듯한 큰 목소리가 터져 들려왔다. 영어를 잘하는 친구들을 향한 부러움, 자신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아쉬움, 하지만 우리 반 친구들이 영어를 잘한다는 자부심도 조금 섞인 그런 목소리와 억양이었다.
"오이반은 영어를 많이 해."
평소였으면 곧바로 "L, No Korean, Let's speak English only."라고 했을 텐데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나뿐만 아니라 L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몇 초간의 침묵 후, 한껏 높아진 톤으로 토의를 시작했다. English Only policy는 '아웃오브안중'이었다.
"오이? 오이? Cucumber?"
"우리 유치원에 오이반은 없는데?"
"에엥? Cucumber class?"
"아니야! Cucumber class는 없어!"
"티쳐, 우리 유치원에 Cucumber Class 없지요~?"
평화로웠던 수업 시간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건 너무나도 심각한 비상 상황이었다. 지금 당장 깔끔하게 결론을 내야만 하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모두들 눈이 동그래져서 L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이게 무슨 이야기냐며 의아해했다.
나도 순간적으로 '이게 무슨 말이지?' 하며
L에게 "오이반은 어느 반이야?" 하고 침착하게 물어보았다.
다행히 L는 발음이 조금 약할 뿐 상남자다.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창피해하지 않는다. 절대로 기죽지 않는다. 조금 전보다 더욱 크고 당당한 목소리로 한번 더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아니, 오이반! 오이반!!"
아, 우리 반................
역시 반복이 힘이다.
L를 제외하고 나를 포함한 우리 반 모든 친구들의 표정은 다 똑같았고 일제히
"아....... 아아....... ^^;"
짧은 탄성 혹은 탄식 이후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곧바로 수업을 재개했고,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오이반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최근 이렇게 집중력과 협동심이 좋았던 날이 있었나 싶을 만큼 훌륭한 수업이었다.
나와 똑같은 마음이었던 그 순간의 우리 반 아이들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생각할수록 귀엽고 웃기다. 하루종일 그 표정을 떠올리며 큭큭거렸다.
오늘도 아이들에게 배운다.
이 험한 세상은 L처럼 살아가야 한다.
비록 발음은 조금 부정확하지만 기죽지 않아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을 당황하게 만들지언정, 나는 끝까지 당황하거나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
모두가 영어로 말하는 상황이라도, 내가 지금 당장 해야만 직성이 풀릴 만큼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땐 고민 없이 당당하게 한국어로 크게 외칠 수 있는 상여자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지금보다는 조금 덜 눈치 보며 살 수 있지 않을까.
L에게 용기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