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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joo Oct 27. 2024

Ep.03_대장 되는 방법

우리 집 대장은?

9월의 어느 날 1교시 수업.

7세 2년 차 아이들의 Reading 수업 시간이었다.

다 같이 새로운 영어단어들을 익히고 본문 내용을 파악해 본 뒤에, 각자 문제 푸는 시간을 가진다.

조용히 집중하여 문제를 풀어야 하는 시간에 갑자기 소곤소곤 들려오는 대화.


그동안 아이들과 뒹군 시간과 경험 덕분에, 대화를 시작하는 아이들의 톤, 소재, 분위기 등을 통해 이 대화의 흥미도를 대충 예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버렸다. 특히 선생님이나 주변의 어른들을 의식하지 않고 아이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들은 녹음을 하고 싶을 만큼 명대사인 경우가 있다. 가끔 이런 소중한 순간이 찾아오면 잠깐 나의 직업 정신을 모른척하고 수업 중에 딴짓을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오늘의 '낄낄 타임'이구나.' 하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나는 너희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라는 표정과 자세로 조용히 있어본다.


J와 K는 공통적으로 각 집의 에너지 넘치는 두 형제 중 장남들이다. 애정 표현도 많고 무엇보다 나랑 수다 떠는 걸 너무 좋아하는 귀염둥이들이다. 장난이 많아서 주의를 받기도 하지만 1년 반 이상을 함께 하다 보니 내가 본인들을 많이 아끼고 사랑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가끔은 실수를 웃음으로 때우기도 하고, 애교로 넘어가려고도 한다.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실실 웃게 되는 그런 아이들이다.



- J: 우리 집은 엄마가 대장이야.

- K: 그래? 우리 집은 아빠가 제일 나이가 높아서 아빠가 대장이야.

- J:......... 우리 집도 아빠가 제일 나이가 높은데 엄마가 대장이야.

- K: 왜?

- J: 몰라. 그냥 엄마가 대장이야.

- K: 왜? 엄마, 아빠가 가위바위보 하셨어?

- J, k:....???


대화가 끊겼다. 웃음기 싹 뺀 진지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내가 실수로 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가위바위보 발언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J의 아버님이 나이가 가장 많으시지만, 왜인지 모르게 어머님이 대장을 맡으신 것까지는 잘 참았는데, 예상하지 못한 '대장 되는 방법'에서는 웃음 참는 걸 실패하고 말았다.


J와 K는 아마 좀 더 크면 알게 될 거다. 빠르면 10대 후반에, 늦으면 본인이 한 가정의 가장이 될 때 즈음에.

아빠보다 나이가 적은 엄마가 대장이 된 이유를 알게 될 거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두 아들을 키우다 보니 어리고 여렸던 엄마가 대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다. 아니, 꼭 알았으면 좋겠다.


어른이라서 이해하고,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삶의 다양한 모습들이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새롭다. 엄마, 아빠의 역할을 대장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나이에 따라 대장이 정해지는 것도, 대장이 되는 방법도 다 새롭다. 매일 반복되는 직장 생활만 하다 보면 내가 만들어 놓은 편안한 나만의 생활 방식에 젖어버려서 나와 다른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가 참 어렵다. 노력하지 않으면 쉽게 되는 일은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그렇다.


그런 나를 우리 반 아이들이 깨우쳐 주곤 한다. 나보다 한참 짧은 시간을 산 아이들이지만, 지금껏 내가 보지 못했거나, 잊고 있었던 시각을 들려주고 보여준다. 숨겨놓은 의도 없이 순수하고 유쾌하게 알려주는 내 아이들이 참 고맙다. 나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줄 뿐인데, 나에게는 교과서에서도 배우지 못하는 지식 이상의 것들과 웃음을 채워준다. 이러니 매일 목이 쉬어도 씩씩한 목소리로 수업할 수밖에 없고, 다리가 후들거려도 부지런히 뛰어다닐 수밖에 없고, 아무리 말썽을 피워도 예쁘지 않을 수가 없다. 내 일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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