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joo Nov 03. 2024

Ep.05_Number one!

뭐가 됐든 통하면 됐지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에 쓰는 음성, 문자 따위의 수단. 또는 그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사회 관습적인 체계.

'언어'



영어는 처음 시작할 때와 달리 초등학교 고학년을 향해갈수록 언어의 원의미는 점차 옅어지고 '필히 공부해야 하는 주요 과목 중의 하나'로 인식하게 된다. 배우는 아이들도 그렇겠지만 가르치는 내 입장도 그렇다. 영어로 내뱉어주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소중했던 시기는 금방 잊어버리고 보다 정확하게 말하고 쓸 수 있도록 정답을 입력시키게 된다.


하루에 6세부터 12세까지의 다양한 나이와 수준의 아이들을 매일 가르치다 보면 아침에 추구하는 '영어'와 오후 시간대에 추구하는 '영어'의 방향이 다르다는 걸 느낀다.


그 전날 오후 내내 12세 아이들에게 품사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단어의 의미, 문장 구성 요소, 문법 등을 설명하다가도, 다음 날 아침 Y와 같은 6세 아이들과 수업을 하면 '뭐가 됐든 통하면 됐지.' 마인드로 바로 바뀐다.



Y는 2학기 9월에 입학한 파릇파릇한 신입생이다. 집에서 어깨너머로 형의 영어 수업을 귓동냥하긴 했지만 아직은 알파벳의 음가를 정확하게 습득하진 못했고, 영어를 좋아하고 자신감은 있지만 원어민 선생님들과의 소통에서는 어느 방향으로든 일방적이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고 기다리는 오후 간식 시간. 원어민 선생님과 간식을 먹고 있는 내 교실에 잠깐 챙길 게 있어 들어갔다. Y가 처음 나눠준 간식을 맛있게 다 먹은 참이었다. 입에 있는 간식을 다 먹고 나를 보며 자신감 있는 큰 목소리로


"Number one!" 하고 외쳤다.


파닉스 교재 문제를 같이 풀 때, "Number one!", "Number two!"... 를 자주 말하곤 한다. 영어를 처음 배우는 친구들도 대부분 One, two, three...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에 문제 번호를 찾는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 아이들 모두와 속도를 맞추기 위해 수업 시간에 내가 강조해서 많이 쓰는 표현 중 하나이다.


Y가 갑자기 나를 보며 너무 당당하게 "Number one!"을 하길래, 'Hello 밖에 못하던 우리 Y가 이제 스스로 이 표현도 기억해서 말할 수 있네. 많이 컸네.' 생각하며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봐주었다.


그런데 이 정도 리액션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Y가 또다시 "Number one!" 하고 이번에는 더 크게 외쳤다.


그래서 나도 이번에는 "Oh~ Number one! ^^" 하고 더 큰 미소와 함께 잘했다는 칭찬의 의미로 따라 말해주었다.


하지만 Y는 웃지 않았다. 정색을 하고 또 똑같이 얘기한다. 이번에는 뭔가 이상하다. 나한테 당당하게 바라는 게 있는 눈치였다. 이 정도 리액션이면 Y도 같이 웃으면서 상황이 종료가 되어야 하는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영 느낌이 이상했다.


1-2초의 짧은 두뇌 회전 끝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One more, please...??"

하고 물어봤더니,


"YES! YES!!

YE, YE, YES!!!"

드디어 만족스러운 함박웃음으로 대답해 주었다.



One.

한 달 넘게 매일 간식 시간마다 알려주었던, 간식을 더 먹고 싶을 때 쓰는 표현, 'One more, please.' 한 문장 중에 Y 머릿속에 힘들게 살아남은 One!


다행이었다. 'One'을 잊지 않고 얘기해 주어서 고마웠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당당한 표정으로 일관해주어서 숨어있는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비록 세 단어 중에 한 단어뿐이었지만, 다행히도 아이들의 눈빛만으로도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선택적 독심술사'도 부업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단어 하나 힌트면 충분했다.


끝까지 용감했던 Y에게 "One more, Please~"를 다시 한번 짚어서 이야기 먼저 해주고 같이 있던 원어민 선생님과 잠시 박장대소의 시간을 가졌다. Y에게 간식을 하나 더 주고 교실 문을 나오며 그새 망각했던 '언어'의 의미를 떠올린다.


'뭐가 됐든 통하면 됐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