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9_Portrait
feat. 보라색 선
매년 봄, 영어 유치원에서도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을 서로 알아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영어 학습이 메인이다 보니 아무래도 일반 유치원보다야 당연히 적은 편이지만, 새 학기를 맞이하는 아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시간이기에 우리 어학원에서는 간단하게라도 이런 시간을 가지려고 하고 있다.
R은 7살 여자친구로 큰 키만큼이나 정신연령이 높고 성숙하다. 초등학교 1학년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말과 행동이 빠르고 사회생활도 야무지다.
같은 날 입학 한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빠르게 요일 별 하루 일과를 기억하여 다음 수업 시간과 내용을 미리 파악하고, 각 과목 선생님들의 특징과 친구들의 성향에 맞게 행동할 줄 안다.
당연히 대근육만큼이나 소근육 발달 정도도 훌륭하여 글씨와 그림 솜씨가 웬만한 초등학교 저학년 남자친구들보다 낫다.
그런 R이 담임 선생님인 나의 초상화를 그리는 시간이었다. 매해 반복하는 활동 중의 하나였고, 6,7세 아이들의 그림 실력 또한 충분히 예상 가능하기에 그날도 별생각 없이 활동이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R이 우렁찬 목소리로 "I am done!"을 외쳤다.
활동지에 '참 잘했어요!'의 의미로 하트를 그려주려고 나의 초상화를 보자마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R이 그린 내 얼굴 속 두 눈 밑에 각각 보라색 선 여러 줄이 겹쳐져서 그려져 있었다.
'설마, 아닐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OOTD가 사진처럼 똑같이 그려진 걸 보고 그 보라색 선들이 내 다크서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입은 아이보리 프릴이 포인트인 세일러 카라 네이비색 블라우스, 나름 색을 맞춰 입은 아이보리색 면바지까지 누가 봐도 바로 '나'였다.
그리고 그 보라색 선들은 분명히 내가 그동안 차곡차곡 모으고 있었던 '다크서클'이었다.
R이 아무런 악의 없이 보이는 그대로 그린 나의 초상화를 보고 그날 퇴근길에 고민 없이 컨실러를 구매했다.
'아이들 눈에 내가 이렇게 보이는구나. 나 이 정도로 피곤해 보이는 선생님이었구나. 내일부터 조금이라도 덜 피곤한 선생님이 되어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선크림 외에 메이크업을 하지 않지만, 그날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길 버스에서 나의 보라색 선들 위에 피치 컬러 컨실러로 정성스럽게 색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