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주 전, 첫눈이 살벌하게 내렸던 날. 출근길 대혼돈을 예상하며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눈길을 헤치며 달리는 출근 버스에서 학부모님들의 연락이 이어졌다. 셔틀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개별 등원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1교시 수업 벨이 울렸지만, 셔틀버스 두 대가 아직 도착을 하지 못했고, 개별 등원을 하기로 했던 아이들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친구들을 기다리며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수업을 진행하였고, 다행히 2교시 시작 전에는 모든 친구들이 등원을 마쳤다. 쉬는 시간이 되자 늦게 온 아이들이 자랑스럽게 지각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지각한 세 친구들의 이유가 모두 동일했다.
눈싸움 그리고 눈사람
눈이 많이 왔기 때문에 당연히 눈싸움을 했어야만 했고, 눈사람을 반드시 하나 이상은 만들었어야만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을 도저히 순순히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1교시를 쿨하게 제끼고(?) 눈 밭을 신나게 뒹굴다가 왔다는 이야기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눈밭을 뒹군 우리 반 아이들도 대단하지만, 마음껏 뒹굴 수 있도록 '모닝 스노우 타임'을 허락해 주신 어머님들의 넓은 마음과 육아의 지혜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눈으로 뒤덮인 옷과 신발을 깨끗이 처리하고 멀끔한 모습으로 변신시켜 직접 등원이라는 모든 미션까지 클리어하신 어머님들께 진심을 담아 박수 쳐 드리고 싶었다.
처음 든 생각은 '아니 아무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눈싸움하느라 한 교시를 땡땡이치는 건 아니지 않나? 게다가 노느라 셔틀버스를 못 타고 이렇게 직접 데려다주는 수고를 하셨어야 하나? '였다. 하지만 10초 후에 다시 든 생각은 '그렇지, 이게 맞는 거지. 이래야 아이들이지.'였다.
어린이의 의무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에 맞춰 건강하고 즐겁고 안전하게 노는 일'이다. 재미있게 잘 노는 아이가 건강한 아이다. 이 사실을 알고 동의하면서도 매일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에 익숙해지다 보니 잠시 아이들의 역할을 잊었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가고 있는 아이들과 올해를 함께 보내고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은 오전부터 멈출 듯 멈출 듯하며 오후까지도 계속 눈이 내렸다. 6살 아이들과 한창 오후 수업을 하던 중, 우리 반 똑똑이 S가 대뜸 "티쳐, 오늘 퇴근하고 나서 눈싸움하러 갈거지요?" 라고 질문했다. 순간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마치 "오늘 퇴근하고 저녁밥 먹을 거지요?" 같이 아주 당연한 질문을 하는 듯한 억양이었다. S의 얼굴을 바라보며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선생님이 퇴근할 때쯤엔 이미 깜깜해져서 눈싸움은 못할 것 같은데..."라고 말했더니, S가 발끈하며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굳은 얼굴과 아주 단호한 어조로 "깜깜해지기 전에 얼른 눈사람 만들어야지요! 눈싸움해야지요!" 하고 나를 다그쳤다.
오늘 우리 반 아이들에게는 중대한 공통 과제가 있었다. 과제를 제공한 사람은 없었지만
과제를 부여받은어느 누구도 미루지 않고 적극적이고 완벽하게 수행한 필수 과제가 있었다. 설날에 떡국을 먹고, 생일에 케이크를 먹고, 크리스마스에는 산타할아버지로부터 선물을 받아야 하는 것만큼 당연한 낭만적인 과제.
눈이 이만큼 많이 오는 날에는 수업이고 뭐고 눈밭에서 뒹굴어야 하고, 퇴근이 늦더라도 반드시 눈싸움을 해야 하며 적어도 하나 이상의 눈사람을 만들어야만 한다.
나의 낭만 과제는 뭘까 고민해 보았다. 12월의 낭만 과제가 한 가지 생각났다. 고등학생 때부터 지켜왔던 나만의 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