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펑펑 오는 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by 아름다운 관찰자

설연휴전 다시 입원하게 된 딸아이가 있는 개방병동으로 남편과 교대하기 위하여 새벽부터 일어나 서둘렀는데도 버스를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며칠 전부터 눈이 많이 내리기 시작하여 자가용으로 운전해서 가는 것이 무척 부담이 돼서 병원까지 버스를 이용하기로 하고 나섰던 참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남이 지나가지 않은 하얗게 쌓인 눈 위를 밟고 지나가는 느낌이 좋아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뽀드득뽀드득 다소 여유 있게 걸었는데 버스를 놓치고 만 것이다. 보통은 15분 정도 기다리면 다음 버스가 오기에 별 걱정 안 하고 기다리기로 하고 서 있는데 기다리다 보니 좀이 쑤셨다. 그리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기엔 바람이 너무 차고 시렸다. 그래서 내친김에 다음 버스 정류장까지 걷기로 하였다. 다음 버스 정류장까지 도착하여 전광판을 보니 그래도 버스 대기 시간이 15분 그대로 떠서 한번 더 다음 정류장을 향해 호기롭게 걸어갔다. 그런데 다음 정류장에서도 버스 대기 시간은 변함이 없었다. 버스가 눈 때문에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다행히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전전 정류장을 지나고 있다는 표시가 떴다. 곧 오겠거니 했는데 버스는 원래 코스대로 들어오지 못하고 다른 길로 가버렸다. 이런 낭패가 있나! 가만히 처음 정류장에서 기다렸으면 버스를 탔을 텐데 택시도 잡히지 않았다. 곧 남편의 출근 시간은 다가오는데 버스조차 타지 못했으니 큰일이었다.


남편에게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난 서둘러 이마트가 있는 큰길로 걸어 내려왔다. 이마트 근처에 있는 버스정류장에는 병원까지는 못 가더래도 시외버스터미널까지는 가는 버스가 많기 때문에 거기서 버스를 갈아타서라도 갈 참이었다. 남편은 눈 때문에 어차피 차가 많이 막히니 택시는 이용하지 말고 버스를 이용해서 조심해서 오라고 당부했다. 이마트 근처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전광판을 보고 터미널행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서 있는데 멀리서 내가 탔어야 할 버스가 기적처럼 나타났다. 원래 예정된 코스를 변경해서 돌아서 온 버스를 딱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이 얼마나 호재인가! 그런데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버스카드 기능이 들어있는 신용카드가 없었다. 곧 버스를 타야 하는데 어디서 흘리고 왔는지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기억을 거슬러 보니 원래 타야 할 버스가 곧 도착할 줄 알고 신용카드만 빼서 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버스가 골목길을 들어오지 못하고 다른 길로 가버리자 주머니에 아무렇게 쑤셔 넣고 서둘어 걸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아마도 그때 남편과 여러 번 통화하느라 핸드폰을 꺼내면서 주머니에 함께 있던 신용카드도 어딘가에 떨어져 버린 것 같았다.


원래 서는 정류장이 아니었지만 손을 흔드니 기사님이 문을 열어주셨다. 현금도 버스카드도 없었지만 기사님은 친절하게도 그냥 타시라고 하셨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빈좌석에 앉아 전화를 걸어 남편에게 바로 신용카드 분실신고를 요청하였다. 그 카드는 남편 명의로 된 중요한 카드였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어떻게 카드를 분실할 수 있는지 의아해했지만 난 당장 분실신고 해야 한다고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눈길에 버스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중간지점인 터미널까지 잘 오는가 싶더니 터미널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1시간을 기다렸다. 이제는 남편이 제시간에 출근하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른 아침에 예고에 없던 채혈을 한 문제로 아이가 발작해서 강박을 하고 있던 상태라 남편은 내가 오기까지 옆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난 버스 안에서 의식적으로 나에 대한 불행의 스토리를 쓰려는 것을 애초부터 차단했다. 어찌어찌하여 맨 처음부터 버스를 놓쳐 그 이후의 모든 일들을 겪어야 했던 것을 말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대로 그냥 받아들이고 그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찾아서 하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이었다.


다음 버스가 기다리고 있던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가버린 순간부터 난 움직이며 최선의 방안을 생각했고 해결하는 쪽으로 에너지를 쓰기 시작했다. 다행히 원래 타려던 버스를 만났고 늦더래도 병원으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평소 같았으면 한소리 했을 남편의 반응도 크지 않았기에 신용카드를 잃어버린 일도 자책하지 않고 흘려보냈다. 분노하거나 비난이나 판단을 나를 향해하는 순간 안 좋은 감정과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헤어 나오는데 또 한참 걸리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또 개방병동에 입원하게 된 것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엇이 원인이었든 간에 이미 일어난 일이고 내가 마주해야 할 현실이다. 피할 길조차 없다. 하지만 아픈 아이가 낫기까지 아이와 남은 가족을 위한 최선을 난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해답은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나에게로 이미 오고 있다. 오늘처럼 폭설로 서야 할 정류장을 지나가버린 버스를 우연히 다시 마주쳐 무사히 병원에 도착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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