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된 찬희는 아픔도 아픔이었지만 꼼짝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병원에서 쉬고 있는다고 해서 모든 걸 내려놓고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금 머리가 아파왔다. 머릿속에서는 엄마 없이 유치원에 다니고 있을 서후 생각, 서후의 등하원을 책임지고 있을 연세 드신 엄마 걱정, 주말마다 병원에 들르는 선희에 대한 미안함, 재취업에 성공해야 한다는 조급함, 이런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얼른 나아서 이 창살 없는 감옥을 빨리 벗어나야 할 텐데...'
찬희는 침대에 누워서도 자나 깨나 온갖 걱정들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걱정에 이은 신세 한탄은 자신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깊은 자괴감에서 도망쳐 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달아나려 하면 할수록 더욱 자신을 따라오는 듯했다.
'교통사고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애 딸린 실업자 젊은 미망인.'
한 사람에게 이런 꼬리표가 따라붙는 것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자신에게 인생은 너무나 가혹하게만 느껴졌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삶에 대한 넋두리마저도 길어지자, 찬희는 서러운 마음에 갑자기 울음이 솟구쳤다.
그리고 눈물은 이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흐르는 눈물을 닦기 위해 침대 옆 선반으로 손을 뻗어 화장지를 집던 찬희는, 지난번 수현에게 받은 책을 비닐에 담은 채로 화장지 밑에 놓아두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수현 언니가 사다 준 책을 깜빡하고 있었네.'
찬희는 비닐에 담긴 책을 꺼내어, 처음 책을 받았을 때처럼 스르륵 훑어보았다. 대충 읽어봐도 연예인, 특히 코미디언이라서 그런지 책을 정말 재미있게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중간 부분을 펴서 몇 자 읽어 보던 찬희는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서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입장과 비슷한 사람의 글이다 싶어, 찬희는 첫 장부터 책에 푹 빠져버렸고, 책은 술술 잘 읽혔다.
꼼짝 않고 앉은자리에서 책의 반 이 상을 읽게 된 찬희는, 책을 읽어 나가자 재치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힘을 주는 글에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제야 막혀있던 숨통이 좀 트이는 것도 같았다.
'언어 관련 전공자도 아닌 연예인이 이런 책을 쓰다니...'
진우가 떠난 이후부터 찬희는 자존감이 점점 바닥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쓸데없는 자존심으로만 똘똘 뭉친 모순덩어리,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로만 느껴졌다. 그런 삶에서 좀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에, 딴에는 열심히 살아보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그저 앞만 보고 열심히만 살려고 했지, 자신을 깊이 되돌아보며, 어떻게 하면 인생을 좀 더 가치 있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찬희는 불현듯 자신의 내면에 담긴 이야기들을 적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예인이 이런 책을 낼 정도라면 전공자인 자신 또한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저도 모르게 불끈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나도 글을 한 번 써 볼까?'
언제부터 계속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불규칙적인 직장 생활과 퇴근 후 육아로 인해 매일 긴 글을 쓰기는 힘들었던 찬희였다. 하지만 지금은 병원 신세를 지고 있으니 어차피 자신에게 남아 있는 건 시간 밖에 없을 터였다. 걱정과 신세 한탄의 시간만 줄인다면...
'그래, 시간이 주어진 거야. 잠시 멈춰 서서 나 자신을 돌아보라는...'
그러면서 찬희는 왜 나쁜 일들이 자신에게만, 연속적으로 이어졌는지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자신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것 같은 이 무시무시한 불행은, 알고 보면 인생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든 한 번쯤은 다가올 수 있는 운명의 장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만큼은 유독 가혹한 형벌과도 같았지만, 책을 썼던 연예인에게도 불의의 사고가 닥쳐왔듯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나 혼자만 죽을 만큼 힘든 건 아닐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그러자, 찬희는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했다.
'그래, 누구에게나 인생의 고비는 있는 법이지.'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들은 진우에 대한 그리움에 이르렀고, 찬희는 사람이 죽고 사는 건, 자신의 운명일 뿐, 어느 한 사람의 잘잘못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불현듯 떠올랐다.
자신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어느 누구에 대한 원망도 다 내려놓아야겠다고 여기니, 운명이란 나를 무너뜨리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나를 새롭게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대체 얼마나 크고 좋은 일에 쓰려고 하늘이 이런 혹독한 시련을 줬던 거야?'
해답을 얻을만한 무언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자, 찬희에게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섬광이 뇌를 스치는 듯했다.
'맞아! 이건 내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라고 하는 메시지였어! 일단 쓰자. 내 이야기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내 노력으로 이 운명의 굴레를 뚫고 나오게 된다면 내 스토리는 사람들에게 더욱 감동을줄 거야.'
찬희는 선희가 두고 간 볼펜을 서랍에서 꺼내었다. 그리고 책의 빈 여백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글은 내가 살기 위해 적는 이야기다.'
찬희는 자신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그 부족함을 자신의 이야기로 한 자, 한 자 채워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