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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33화] 병실에 놓인 책 한 권

by U찬스


진통제를 맞지 않아도 머리의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찬희는 그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휴대폰을 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은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아무것도 할 엄두가 나지 않아 않았지만, 이제 그 정도까지는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고와 함께 휴대폰도 박살 나면서 수중에는 휴대폰이 없었다. 찬희는 주말마다 들리는 선희에게 새 휴대폰을 부탁하였고 선희는 휴대폰을 개설해서 찬희에게 가져다주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휴대폰을 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저장되어 있던 연락처는 모두 날아가 버린 상태였다.

누구에게든 자신의 소식을 알리고 싶었던 찬희는 누구의 전화번호도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전화번호라고는 진우, 선희, 엄마, 그리고 면세점 매장 번호 밖에 없었다.

매장은 이미 사라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번호를 눌러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한참 이어지는 전화연결음을 듣다가 그냥 끊어버리려고 하던 순간, 누군가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스카이면세점 00 코너 김수현입니다."

전화를 받은 이는 다름 아닌, 옆 브랜드에서 같이 근무하던 수현이었다. 수현의 상냥한 목소리를 듣자, 찬희는 너무나 반가웠다. 전화 연결이 안 될지도 몰라 큰 기대 없이 걸어본 전화에서, 옆 코너에서 자신에게 오랜 시간 큰 도움과 위로가 되어 주었던 수현이 연결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수현의 목소리를 듣자 기분이 좋아진 찬희는 수현에게 슬슬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목소리를 최대한 깔고 목에 힘을 주며 전화기 너머의 수현에게 말했다.

"김수현 씨, 클레임 할 게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그러세요, 고객님. 무슨 일로 그러실까요?

수현의 목소리에는 순간 약간의 두려움이 묻어 나왔지만, 금세 순발력 있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김수현 씨,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제가 클레임 좀 걸려고 하는데요. 크윽."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참지 못한 웃음이 새어 나와 버렸고, 찬희의 장난임을 감지한 수현이 다시 정색하며 받아쳤다.

"윤찬희 고객님. 이렇게 업무에 방해해시면 신고해 버릴 거예요. 혼인신고."

두 사람은 모두 피식 웃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언니, 잘 지내셨어요?"

"그래, 찬희야. 너희 매장 정리되고 난 뒤에 어찌 지내나 궁금해서 톡 보냈는데 읽지도 않고 답도 없더라. 얘! 너 어떻게 된 거야?"

찬희의 답변이 궁금했던 수현은 숨죽여 찬희가 대답하기 만을 기다렸다. 찬희가 큰 호흡을 한 번 한 뒤 말을 이어갔다.


"그러셨구나! 언니, 저 교통사고 크게 났었어요. 머리랑 다리 수술하고 지금 입원해 있어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찬희의 말에 수현은 쥐고 있던 볼펜마저 떨어뜨리며 말했다.

"뭐라고? 교통사고? 어머! 어머! 지금은 괜찮은 거야?"

"네, 수술하고 며칠 못 깨어났는데, 이제 슬슬 좀 나아가는 것 같아요."

찬희의 답변에 수현은 안심이 되었다. 하긴 전화로 장난도 칠 정도였으니 이제는 좀 살만한가 싶기도 했다.

"찬희야, 어느 병원에 입원한 거야? 나 오늘 오전 근무라서 퇴근하고 바로 갈게."

"새빛 대학병원인데요. 언니, 안 오셔도 돼요. 괜히 언니한테 부담드렸네. 사고로 휴대폰도 엉망 되는 바람에 기억나는 게 매장 전화번호 밖에 없어서 혹시나 하고 전화한 거였는데, 언니가 받으실 줄은 몰랐어요."


"아, 그랬구나. 너희 매장 철수했어도 비어 있는 매장 상태로 그대로 있어서 전화기도 아직 있더라고. 벨 소리가 나길래 내가 얼른 뛰어 와서 받은 거야."

"저희 매장 자리에 아직 들어온 브랜드는 없나 보네요. 아휴... 그래도 언니 매장은 아직 잘 버티고 있어서 다행이에요."

"우리도 예전만큼 매출이 올라오지는 않아서 마음이 편하진 않아. 그나저나 너 몸 안 좋아서 통화 힘들 테니 병실 호수만 알려주면 퇴근하고 바로 가볼게."

안 그래도 몸이 다시 힘들어져서 더 대화를 이어가기 쉽지 않았던 자신의 몸 상태를 눈치챈 수현에게, 찬희는 "그럼 시간 나실 때 천천히 오세요. 502호로."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몸이 슬슬 나아간다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무리하는 건 쉽지 않겠다 싶었던 찬희는 겨우 자리에 누워 이불을 잡아당겼다. 눈을 감은 찬희는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수현은 퇴근 후 곧장 병원으로 가는 게 맞는 일인지 잠시 망설였다. 요즘에는 병문안도 쉽지 않은 데다가, 괜히 찾아갔다가 찬희에게 부담만 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장난스럽게라도 전화를 한 찬희의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외로움과 고통의 시간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 그냥 가보자. 많이 힘들었을 텐데...'

수현은 마음을 굳히고는 찬희가 입원한 병원으로 출발했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빈 손으로 들어갈 순 없어 무엇을 준비할까 하다 고민하던 중에, 병원 옆 건물에 있는 서점이 눈에 들어왔다.

'찬희가 책을 좋아한다고 했었지? 찬희가 좋아할 만한 책이 뭐가 있을까?'

수현은 여러 책들을 뒤적이다가 찬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화기 너머로 장난을 치던 찬희의 목소리는 애써 밝게 하려 했지만, 분명 힘들었을 터였다. 그런 찬희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만한 글이 필요할 것 같아, 수현은 큰 사고를 딛고 일어선 한 연예인이 쓴 책을 선택했다. 자신도 그 책을 재미있게 봤던 터라, 병실에서 하루 종일 적적해할 찬희가 읽기에도 좋을 거라 생각했다.


'찬희도 이 책 읽고 힘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수현은 계산을 마친 책을 가방에 넣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병원에 다시 도착한 수현은 5층에 도착해서 병실 문을 살며시 열었다. 찬희는 얇은 이불을 덮고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가려진 이불 사이로 언뜻 보이는 머리와 다리에는 붕대가 감겨 있어 움직이기에 많이 불편해 보였다. 얼굴색마저 창백해진 찬희의 얼굴을 보니 수현은 마음이 아팠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침대 밑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기며 앉으니, 찬희는 곁에 와 있는 수현의 인기척에 잠이 깼다.

"어머, 언니."

눈을 뜨고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던 찬희를 만류하며 수현이 말했다.


"어, 찬희야. 안 일어나도 돼. 요즘 병문안도 쉽지 않아서 겨우 들어왔어. 걱정 많이 했는데, 너 얼굴 봤으니 이제 안심이다. 심심하면 책이나 천천히 읽으면서 조리 잘하고 있어. 다음에 또 올게."

말을 마친 수현은 갖고 온 책을 찬희의 침대 옆 테이블에 슬쩍 올려놓았다.

"언니, 뭐 마실 거라도..."

라며 또 일어나려고 하는 찬희를 다시 말리면서 "찬희야, 힘 내."라는 말을 남기며 수현은 병실을 나섰다.

찬희는 수현이 두고 간 책을 비닐에서 꺼내어서 표지를 힐끗 보고는 책장을 넘겨서 글을 몇 자 읽어 보았다.

"사흘 안에 죽는다고 했지만 중환자실에서 일주일을 버텼다. 그리고 살아서 일반 병실로 돌아왔다. 나는 죽지 않았다."

교통사고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한 연예인이 쓴 책이었다. 큰 사고를 계기로 자신의 삶이 바뀌었다고 하는.


찬희는 다시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책을 덮어버렸지만 수현의 마음이 담긴 책 선물이 고맙게만 느껴졌다. 찬희 또한 사고로 생사를 달리할 뻔했지만 책의 저자와 같이 아픔을 잘 딛고 일어서기를 바라는 수현의 애틋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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