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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37화] 녹이 슨 심장에 피는 꿈

by U찬스


목발을 짚고 한참을 기다린 찬희는 석훈의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다 잠시 멈칫했다. 진우와의 괌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이후로는 오랜만에 석훈을 본다는 생각에 설렘과 함께 긴장감이 맴돌아 목발을 쥔 손에 땀이 배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가게 입구에서 목발을 짚은 체 서성이는 손님을 보고는 부축하기 위해 얼른 달려간 석훈은,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찬희라는 것에 깜짝 놀라며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이고! 찬희야! 퇴원한 거야? 이렇게 움직여도 되는 거야?"

찬희는 석훈과 마주친 순간 반가운 마음에 웃어보려 했지만, 입꼬리가 약간 흔들렸다. 아직 몸이 완전히 괜찮아진 건 아닌 것 같았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찬희가 말했다.

"괜찮아요, 선배. 이제 많이 나아졌어요. 근데, 와! 가게 좋은데요."

석훈이 안내해 주는 의자에 앉으며 찬희가 말했다.


"병원에 있으면서 계속 선배한테 가 봐야지 했었는데, 이제야 왔네요. 오늘 퇴원했거든요."

"퇴원하자마자 이렇게 들러 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손님. 하하."

그렇게 말하며 석훈은 가게에서 제일 인기 많은 메뉴를 찬희에게 추천했고, 찬희 또한 흔쾌히 수긍했다.

북적북적한 가게에 비해 식사는 생각보다 빨리 나왔고, 음식이 입맛에 맞았던 찬희는, 음식을 국물 하나 남기지 않고 싹 비워 버렸다. 시원한 음식이었지만 따뜻한 음식을 먹을 때만큼이나 마음이 녹아내리며 그동안의 고된 날들이 위로가 되는 듯했다.

석훈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지만, 점심 피크 시간이 끝나지 않아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을 위해 찬희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혹시나 석훈이 식사값을 받지 않을까 싶어 최대한 빨리 목발을 짚어 카운터로 향해 계산을 마쳤다.

손님에게 서빙 중이던 석훈은 그제야 급히 달려와 찬희에게 말했다.


"내가 대접하고 싶었는데, 그새 벌써 계산했구나. 입맛에는 맞았고?"

"네, 선배. 진짜 맛있던데요? 병원에 있으면서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먹고, 뭘 씹어도 아무 맛도 안 나서 너무 힘들었거든요. 근데 오늘 마침 날씨도 훈훈해서 지금 먹기에 딱이었어요."

찬희는 문득 병원의 답답한 공기 속에서 겨울과 봄을 무사히 넘기고, 다시 세상으로 나온 자신이 신기하고도 대견하게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이던 찬희에게 석훈이 말했다.

"이게 맛있게 드셨다니 정말 다행인데? 오랜만에 얼굴 봤는데, 얘기도 제대로 못해서 어쩌지?"

"저도 오랜만에 선배랑 얘기도 더 나누고 싶으니까 근처 카페에 갔다가, 브레이크 타임되면 다시 잠깐 들를게요."

"그래도 괜찮겠어? 그럼 요 앞길로 좀 더 나가면 옛날 우리 다니던 학교도 보일 거니까 주변도 한 번 구경하고 오던지."

찬희는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이곳이 자신이 다니던 대학교 근처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됐다.

택시에 올라타 석훈의 명함에 적힌 도로명 주소만 알려줬을 뿐, 그곳이 어느 동네였는지 확인을 안 했던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바쁜 석훈을 뒤로하고 가게에서 나온 찬희는 학교 다닐 때와는 많이 달라진 동네 풍경에 사뭇 놀랐다. 예전에 없던 대단지 아파트들도 주변에 여럿 들어서면서 일대는 더욱 번화가로 변해 있었다.

목발에 의지해서 큰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나오니 카페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찬희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다가 손님이 많지 않은 어느 카페로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은 찬희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스피커에서는 리듬이 무척 빨랐지만, 경쾌한 곡인 윤하의 '오르트 구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둠만이 나의 전부였던 동안
숨이 벅차도록 달려왔던 나...

녹이 슨 심장에 쉼 없이 피는 꿈
무모하대도 믿어 난"

찬희는 리듬감도 좋았지만 가사의 내용이 너무나도 자신에게 깊게 와닿아서, 부르기 힘든 곡이었던 노래를 어느새 흥얼거리고 있었다. 가사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려 좀 더 귀를 기울이던 찬희는, 얼마 전 어느 책에서 본 문구인 '나는 닳아 없어지얼정 녹슬어 없어지지는 않겠다.'라는 글도 생각나서, 자신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라도 된 것 마냥 주먹마저 불끈 쥐고 있었다.

진한 커피 향에도 취해 기분이 한껏 업되어 있던 찬희는 이어 나오는 노래들에도 푹 빠진 체 감상을 이어가다, 문득 휴대폰을 꺼내 몇 시인지를 확인했다.

'맞다! 선배한테 들렀다가 얼른 서후 보러 집에 가야지!'

서둘러 카페를 나온 찬희는 다시 해뜰 막국수로 향했다. 한참 북적거리던 가게는 손님들이 대부분 빠져나가 한산해져 있었다. 가게에 들어서자, 그제야 한숨 돌린 석훈이 찬희를 부축하며 말했다.

"어서 와, 찬희야. 밖에서 많이 기다렸지?"

"아뇨, 선배.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노래 들으면서 기분 좋게 있다 왔어요. 이제 손님들 좀 빠졌나 봐요?'

"그래, 여기 빈자리에 앉을래?'

석훈에게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찬희는 의자에 앉자마자, 맞은편에 앉은 석훈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근데 선배. 식당은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 회사는 그만뒀어요? 언제부터 가게 시작한 거예요?"

​"하하. 찬희야, 잠깐만. 하나씩만 물어볼래?"

서두르는 찬희를 말리며 석훈이 말을 이어갔다.

"코로나 터지면서 회사도 타격이 크다 보니까 희망퇴직을 받더라고. 그 이전부터 식당 창업에 관한 책을 보면서 어떤 메뉴를 선택할지 고민하고는 있었거든. 새로운 인생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었던 거지."

"그렇죠? 코로나 때문에 저도 많이 힘들었어요."

"그랬구나. 그런데 막상 회사에서 희망퇴직 얘기가 나오니까 마음도 심란해져서 집사람하고 드라이브하다가 우연히 식당에 들렀거든. 근데 그 집 막국수가 그렇게 맛있더라고."

"그래서 바로 이 거야 했던 거구나?"

"하하.. 맞아. 그런데 그 무렵에 내가 신경성이었는지 위장병이 심해졌어. 병원에서 밀가루 음식 같은 건 되도록 피하라고 하는데,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면종류라서 죽어도 면은 못 끊겠더라고."


​찬희가 아까 먹은 먹은 막국수가 다시 생각나서 침을 삼키며 말했다.

"맞아요. 나도 면종류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치? 그런데 그 집에서 먹은 막국수는 먹고 나도 속이 정말 편안하더라고. 그래서 집에 와서 집사람이랑 계속 얘기했지. 어떻게 반죽하면 그 맛이 나는지. 집사람이 식품영양학 전공이니 그런 거에 대해서 잘 알기도 했고."

"아, 그래서 희망퇴직하고 식당 차린 거였어요? 그런데 서울이 아니고 고향에 내려와서 차렸네요?"

"그래. 마침 집사람도 여기로 발령을 받게 돼서 요즘 한창 번화가인 우리 대학교 근처에 차리게 된 거야."

"아, 그렇구나. 그런데 손님 많아서 좋겠어요. 선배"

"아냐. 가게 차리고 얼마간은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어. 매출이 없으니 남는 것도 없어서 재료도 싼 걸로 바꿔 봤는데, 갈수록 손님이 더 없더라고."


"아이고, 고생 많았겠네요."

"응. 그래서 이건 아니다 싶어서 좋은 재료로 바꾸고 나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점점 손님들한테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더라고. 내가 좀 적게 먹더라도 ​손님을 먼저 위한다고 생각하니까 손님이 저절로 오는 것 같더라."

"그런가 봐요. 저도 얼마 전 책에서 '나를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런 글을 읽긴 했어요."

"그런 것 같아. 그리고 맘카페에 소문이 났는지, 점심 식사하러 오는 엄마들이 최근 들어 많아졌어."

"그렇죠? 엄마들 사이에서는 맘카페의 위력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맞아. 그나저나 넌 병원에서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지냈어?"

찬희의 다리와 목발을 번갈아 보면서 석훈이 묻자, 찬희가 대답했다.

"다리가 이래서 꼼짝도 못 했죠 뭐. 남는 게 시간이라 죽어라 책만 읽었어요. 그런데 읽다 보니까 글도 쓰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글도 좀 쓰고 그랬어요."

"글? 무슨 글? 장르가 뭔데?"


"소설이요. 그냥... 뭐 제 이야기? 제 인생이 그리 평범한 편은 아니었거든요."

"소설? 오! 대단한데? 병원에 있으면서 쉽지 않았을 건데 어떻게 썼어?"

"그냥 아픈 것도 꾹 참고, 하기 싫다는 생각도 꾹 참고 매일매일 정해진 분량만 써야겠다 생각하니까 어느새 책 한 권 분량이 써져 있던데요?"

"그래서 완성했어?"

"네. 뭐, 거의 마무리 단계?"

"그래? 나 서울에서 직장 다닐 때 동기 한 명이 출판사 차린다고 하면서 나랑 같은 시기에 희망 퇴직했었는데, 연락 한 번 해봐 줄까? 원고 보내줄 수 있어?"

생각지도 못했던 석훈의 제안에 너무 놀란 찬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릴 정도였다.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석훈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선배, 정말요? 그래 주시면 저야 너무나도 감사하죠. 사고 났을 때도 저 구해주시고, 이번에도 또 도와주시고.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하죠?"

"에고, 별 거 아닌데 뭘. 집에 가면 이 주소로 메일 보내 줘."

석훈이 명함에 적힌 메일 주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정말 고마워요. 선배. 집에 가서 당장 메일 드릴게요."

"​그래. 일단 나도 읽어 보고 어떤지 얘기해 줄게."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석훈의 도움을 다시금 받게 된 찬희는 떨리는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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