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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린serin Nov 16. 2024

4. 서슬 같은 깨달음

남자의 이야기

강현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여느 때와 같은 이른 아침이었다. 의식만 먼저 반쯤 깨어난 채, 눈을 뜨는 것보다도 더 빨리 옆자리의 아내를 매만지는 손이 있다. 마찬가지로 여느 때와 같은, 무의식의 고의였다. 그렇게 끌어안은 것이 아내가 아니라 새벽공기에 불과한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불과 수 초 후였다. 강현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아주 빠르게 눈을 떴다. 이미 식은 천 위를 두어 번 헛짚었던 손은 거의 동시에 그의 몸을 벌떡 일으켰다.


희미하게 밝힌 무드등이 해가 뜨기 전의 침실을 비추고 있었다. 강현은 픽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며칠 전의 소동이 무색하게 집안은 완벽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아내가 떠났다. 편지 한 장만 남겨 놓고. 집에서 없어진 거라곤 고작 작은 캐리어 하나와 여권, 몇 개의 옷가지, 소량의 화장품뿐이었다.




강현의 삶은 분노와 체념의 굴레였다.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냥, 기억이 존재하던 순간부터 그랬다. 그것을 자각한 건 어머니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지겹다고 느껴진 순간이었다. 이제는 고리타분했다. 그녀가 조금은 애처로웠으나 스스로 파괴한 삶을 또 얼마쯤은 경멸했던 것도 같다. 어머니의 눈은 언제나 붉게 짓물려 있었다. 자신을 배신한 남편을 위해 흘린 눈물이 마를 날이 없던 탓이었다. 차라리 이혼을 하라는 주위의 권유가 빗발쳐도 어머니는 절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버지를 믿었고, 한결같이 사랑했다. 그리고 결국 그 사랑이 어머니를 죽였다.


사랑을 경멸했다. 강현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멸의 길이었다. 보고 배운 것이 그러했다. 모든 것이 지루하고 따분했다. 후회, 죄책감, 공포, 분노 이런 류의 감정에 휩싸이는 편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휩싸이지 않으려 통제했다.  


그런 자신에 비해 세희는 빛이 났다. 언제고 그랬다. 그녀를 볼 때면 강현은 자신이 고장 났음을 더욱 극명히 느끼곤 했다. 세희는 자신과 완벽히 다른 부류였으니까. 기쁨, 행복, 분노, 죄책감, 슬픔, 좌절, 성취감, 사랑...  그 대척점에서 자신은 늘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생각할 때면 얇은 유리판이 가슴에 걸려있는 기분이 들었다. 불쾌하고 답답하고, 마치 스스로를 배반하는 것 같은 기분. 그녀의 앞에 서있으면 자신이 더없이 보잘것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통제 불가능의 영역에 들어 선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정신을 차려보면 자신은 그녀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때로는 불쾌해하기도 했고, 때로는 지긋지긋해하기도 했고, 때로는 밀어내고 싶기도 했고, 때로는 닿고 싶기도 했고, 때로는 끌어안고 싶기도 했고, 때로는 완전히 한 몸이 되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 자신은 늘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웃었으면 했다. 서서히 파괴되는 그녀의 삶을 자신이 지켜주고 싶었다. 강현에게 있어서 지금 그녀에게 품은 이 감정은 오물 속에 묻힌 어떤 진실이었다. 그게 진실이라는 건 알지만 애써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 찾으려 들지 않았던 것. 자세히 그려 보지조차 않았던 것. 그렇기에 지나치게 막연하고 아득한 무엇.


그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최초의 발견 앞에서,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이의 단말마처럼 아주 찰나의 순간에. 사랑이었다. 온갖 모호하고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있었지만 이것은 분명한 사랑이었다. 사랑을 인정하고 그녀를 가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드디어 함께 한 첫 3년은 대단히 평이하고, 단조로운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별것 아닌 듯 예사롭게 흘러가는 삶의 편린들. 고작 그런 것들 따위로 결핍과 고장을 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지극히 평범하고 예사로운 삶 속에 네가 있었기 때문에, 네가 내 곁에 있고 내가 네 곁에 있었으니까.


근데... 정말로 그녀를 가졌었나.  편지를 본 일순간 떠오르는 질문은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너는 떠났는데. 나는 어떡해. 내가 찾아가면 넌 받아 줄까. 아니면 내가 널 잊고 살 수 있을까. 널 잊고 새롭게 시작을 하고 널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살 수 있을까.


이전.

이전, 이전이라고…….


강현은 조소했다.


도무지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전처럼 지낼 수가 없었다. 그는 길을 걷다가도 이따금 자국눈에 쓰러져 버리고 싶었고, 오늘처럼 홀로 잠에서 깰 때면 산란히 일어나는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불이 살라 먹고 재만 남은 폐허 속을 끝없이 걷는 기분이었다. 언젠가부터 그녀가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었다. 저를 보고 웃어 주는 것이 당연했고, 대화를 나누며 간간이 웃는 것이 당연했고, 살을 맞대고 자는 것이 당연했고, 함께 새벽빛을 맞는 것이 당연했다. 그 모든 당연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삶에서 빠져나갔다. 고독은 그림자처럼 찾아들어 삶을 구석부터 먹어 치웠다. 그의 권한 아래 놓여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영역들은 무력하게 침탈당했고 그가 가진 건 온통 썩어가는 것들뿐이었다.


과거의 잔상은 언제 어디서고 출몰했다. 어느 쪽으로 길을 틀건, 늘 거기에서. 지금처럼.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달려간 병원에서 창백한 낯으로 누워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아이를 잃었다. 임신초기에는 흔한 일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이게 흔한 일이라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인가. 자신에겐 전부였다. 그녀에겐 세상이었다. 둘이서 꿈꿔온 밝은 미래가 어두운 싱크홀 아래 처박혔다. 퇴원을 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아이방에 있던 물건을 통째로 내다 버렸다. 악몽에 시달리는지 밤에 허덕이며 깨날 때도 있었다.


처음으로 휴가를 내고 세희와 함께 여행을 갔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단둘이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신혼 때 자주 오던 포코노 산은 눈이 왔을 때 경치가 가히 절경인 곳이었다. 여행 마지막날, 져가는 노을을 보며 그녀가 말했다.


'나는 너무 지쳤어…….'


모든 것을 체념한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분명 몇 걸음 앞에서 면하고 있음에도, 타오를 듯 눈이 부신 붉은 석영 앞에서도, 세희는 마치 광막한 공간에 홀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으레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엷게 얼어 종잇장 같은 얼음처럼, 손대면 그대로 산산이 깨져 버릴 듯한 모습.


세희가 지쳤다고 했다. 강현은 지금껏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 외면해 왔지만, 아물지 못한 그녀의 상처가 계속해서 곪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내심 알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그녀의 시간부터 계속해서 존재해 오던 상처였다.


강현은 그 말에 반쯤 무의식적으로 천천히 한 손을 들었다가, 꽉 주먹을 쥐며 움츠리듯 거두었다. 그건 어떤 의지와도 같았다. 다시 구태의연해지기 위한, 어떤 결단. 그는 고개를 정면으로 향했다. 자신마저 맥없이 무너질 순 없었다. 이렇게는 못 산다. 어떻게든 이겨내야 했다. 강현은 흐트러지려는 입매를 단속했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삼켰다. 하고 싶은 말과 하고 싶지 않은 말도 삼켰다. 그렇게 모두 삼켜 내는 동안, 세희는 끝까지 그를 보지 않았다. 여행은 그렇게 끝났다.


시간이 약이라 생각했다. 대단한 착각임을 깨달은 건 피아노 앞에서 울고 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였다. 그녀가 언제부턴가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그녀에게 피아노는 전부였는데, 이제 보니 그녀의 ’ 전부‘였던 것들은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깨달음은 늘 한걸음 늦다. 축 늘어진 세희의 몸이 안겨왔다. 강현은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사물의 형태를 가늠하듯이, 그녀를 안지 않은 손으로 세희의 젖은 뺨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마치 모르는 사이에 제 몸에 난 상처가 쏟은 피 같다. 뜨거운 눈물이 손바닥 아래로 계속 쏟아졌다.


이렇게 작은데. 넌 얼마나 많은 것을 겪어왔나.


강현은 무어라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허공에 뱉어지는 것은 초라하게 흔들리는 숨결뿐이었다. 흐릿해졌다가 또렷해지기를 반복하는 시야 사이로 그녀의 창백한 낯이 포말처럼 흐트러졌다.


어떻게, 내가 어떻게 해야 되나. 네 아픔을 내가 다 가져갈 수 있을까. 그렇게 하면 네가 행복해질 수 있나.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심장이 와르르 내려앉았다. 지독한 무기력에 침식되는 듯한 아찔함이었다. 강현은 자신도 무너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 무지가 얼마나 막막한 것인지, 무지의 생김새는 얼마나 공포와 닮아있는지…


내가 뭘 잘못했어? 말해줘. 도망치지 마. 울지 마…. 깨진 독처럼 한 번 입을 잘못 열면 와르르 쏟아질 것만 같은 말들이 있다. 엉망진창이고, 꼴사납고, 두서도 없는 그런 비루한 애원 같은 말들이, 언제나 혓바닥 밑에 도사리고 있었다. 애정을 주워 삼켜도 결코 해갈은 되지 않는 것처럼. 둑처럼 쌓아 놓은 감정이 터져버린 것처럼. 그렇게 강현은 한참을 울었다.



깨달음은 서슬 같았다.


침대우에 반듯이 놓인 편지를 집어 들고 읽었을 때 기분은 참담했고 화가 났으며 또 한편으론 올 것이 끝내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심정이었다. 다만 그 시기를 늦출 수 있기를 감히 바랐으나 지옥에서 빈 소원은 끝내 하늘에 가 닿지 못한 듯했다. 그래, 지옥이었다. 되돌아보니 그렇다.


그녀가 연애 때 입버릇 처럼 하던 말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가끔은 널 아주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이제 널 모르겠어.


넌 왜 떠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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