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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린serin Nov 09. 2024

3. 시간의 흐름 속에서 치열하게

다 카포 그리고 피네

입시생의 피아노 과외를 시작했다. 피아노에서 손을 뗀 지 어연 삼 년이나 지났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엔 없었다. 공장에라도 취직할 가 했으나 그동안 쌓아온 스펙이 아까워 관뒀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년을 괴롭혀 온 무기력을 떨쳐버리는 것이 중요했다. 예전처럼 활기차고 희망으로 넘치는 삶으로 돌아가기엔 지나친 거리감이 있었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길 수는 없었다. 무기력의 껍질을 헐벗고 나온 건 자신이 처음으로 행한 대견한 선택이자 성장이었다.




그날, 유일하게 청소를 마치지 못한 창고방 앞에서 세희는  한참을 망설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집에 있던 물건들을 싹 다 내다 버렸지만 피아노 하나만큼은 내던질 수 없어 이 골방으로 옮겨놓았었다. 세희는 우두커니 서있다 문고리를 덥석 잡았다. 이제는 인생의 다음 장이 시작되어야 할 때였다.


문을 열고 그 구석에 놓여 있는 피아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악보도 다 정리한 터라 보면대에 아무것도 없었으나 왠지 첫 음을 떼면 그다음은 손이 기억할 듯했다. 피아노 위 작은 창문에서 새여 들어오는 흰 달빛과 노르스름한 가로등 빛이 방 안 검은 어둠을 희석시켰다. 세희는 피아노 앞에 앉아 그 빛줄기를 바라보았다. 고작 건반 위에 손을 올렸을 뿐이었는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건반을 만졌던 그 집에서 느꼈던 감정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환경이 달라져서? 아니면 나 자신이 달라져서 일가?


다시 한번 차고 맑은 음이 투명한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잔향이 사라지기 전에 세희는 다음 건반을 눌렀다. 그리고 다음, 다시 다음. 하나씩 짚어 나가는 계이름을 흥얼거리던 세희는 그만 한숨 쉬듯 피식 웃어 버렸다. 무의식 속에서 연주되던 곡은 비창소나타의 첫 악장이었다. 악상을 제대로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슬픈 분위기의 서정을 제대로 표현하기 결코 만만치 않기에 기교적으로 어렵지 않다고 가볍게 생각했다가는 큰 낭패를 맛보게 되는 곡. 자신이 제일 좋아하던 곡이었다.


세희는 여리고 섬세한 음을 머릿속에서 되짚어 보며 멈추었던 곡의 다음 음을 짚었다. 그리고 다음, 또다시 다음. 느릿하게 이어지던 음과 음은 그리 오래지 않아 하나의 선율로 어우러졌다.  본래의 박자와 리듬을 찾은 세희는 물 흐르듯 유려한 연주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건반에서 손을 떼고 다시 선율을 만들어내기까지 삼 년의 시간이 흘렀다. 처음으로 꿈을 가지고, 그리고 그 꿈을 버렸던 곳에서.


어느덧 곡은 제일 마지막 악장으로 흘러갔다. 비교적 조용하고 단조롭던 첫 두 악장에 비해 수없이 바뀌는 음들과 빠른 템포, 비장하고 아름다움이 특징인 곡이었다. 실은, 이렇듯 용기를 내서 첫 발을 떼면 그다음은 어렵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비관은 더께로 쌓여 좀처럼 덜어지는 법을 몰랐다. 희망을 용납하지도 않았다. 너무 오래 쌓인 채로 살아와서인지, 마치 한 몸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첫 발을 뗀다는 생각조차 감히 하지 못했으리라. 멋대로 내려버린 결론은 용기가 샘솟을 틈을 주지 못했다.


다시 처음으로, 다카포. 세희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악보의 지시를 따라 악곡의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트릴.  세희는 더욱 풍부해진  선율 속에서  눈을 감고 앞으로의 인생을 그려보았다. 차곡차곡 새로운 것들로 채워나갈 자신을 상상하다 어쩐지 벅차서 눈가가 조금 달아올랐다.


이윽고 피네. 이 희망찬 악곡의 종지부에 다다렀을 때 마지막으로 찍히는 음에 그녀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음의 잔향이 깡그리 사라지기까지 눈물을 흘렸다. 이 것은 기쁨의 눈물 같기도 하고 슬픔의 눈물 같기도 했다. 부딪히는 모순적인 감정의 기점은 앞으로 인생에서의 그의 유무였다. 그래, '그'의 존재였다.


지금 이 순간은 그녀의 인생의 새로운 장으로 나아감에 있어서 중요한 시발점이 될 것이다. 하나 이 순간에도 그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그동안의 세희의 삶에서 너무도 중한 의미를 갖고 있어서. 자신이 무너져 내릴 때 손을 내밀어준 이가 그여서. 그런 그의 옆에서도 아무런 성장을 이루지 못해서. 지금 허물을 벗고 있는 이 순간이 너의 곁이 아닌 것이. 그가, 사랑이 내 유일한 구원자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


당신은 그 편지를 읽었을 때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세희는 그가 찾아오는 것을 바라고 있으나 바라지 않았다. 이것도 모순적이고 저것 또한 모순적이었다.


이렇듯 급작스레 휘몰아치는 감정을 눅잦히는 법은 확실한 것만 보고 달려가는 것이다. 몸을 일으킨 세희가 방의 불을 켰다. 이제는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걸레를 갖고 와 방안을 깨끗하게 싹 닦았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언젠가 확실해짐이 분명했다. 그것을 분명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열심히, 치열하게 하는 것만이 정답이었다.



 앳된 얼굴에 머리를 높게 묶고 골똘히 악보를 연구하느라 오므린 입이 귀여워 픽 웃었다.


" 이 부분이 잘 안 풀리지? 여기선 페달에 힘을 좀 빼야 돼. 아주 얕게, 울림 과하지 않게."


알려준 대로  따라 하던 아영이 아까보다 훨씬 나아진 음에 기쁜지 눈을 크게 떴다. 때 묻지 않은 눈빛이 예뻤다. 현재는 3월 말,  최종 실기시험까지는 약 7개월가량이 남았다. 아영은 재능도 있고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기에 입시까지 순탄할 듯싶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야. 다음 시간까지 이 부분 연습 잘하고. 수고했어."

"네, 수고하셨습니다. 근데 선생님 아까 웃으시는 거 진짜 예뻤어요. 되게 차가운 얼굴인데 웃으시니까 이미지가 달라지네요."

"무섭게 생겼으니까 많이 웃으란 얘기야? 너 잘하는 거 봐서."

"에이 뭐야 선생님, 그 뜻이 아닌데!"

"농담이야. 선생님이 노력할게. 다음에 보자."


입이 삐죽 나온 아영을 일별 한 세희가 아영의 집을 나오자 어느덧 어둑해진 사위가 그녀를 반겼다. 저녁거리를 생각하며 슈퍼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많이 웃으라니. 그동안 내가 너무 무뚝뚝했나."


세희는 어쩐지 경련하는 입가를 매만지며 다음에 있을 과외엔 더 웃어야지 다짐했다. 과외를 한지 벌써 두 달째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매주 세 번, 아영의 집에서 한 시간 동안 이어지는 수업은 재밌었고 활기찼다. 아영을 보며 예전 자신을 떠올리는 순간이 있었으나 잔상은 매번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시절 자신은 아영처럼 순수하지도 발랄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주위 환경이 그녀보다 썩 좋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삶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후원을 받고, 성적도 우수했고 할머니가 그때까진 그나마 좋은 시력을 갖고 있었고... 그리고 그를 처음으로 사랑하고...


세희는 어느덧 도착해 버린 집 앞에 문득 멈추어 섰다. 집 앞 우체통에 흰색 무언가가 꼳혀있었다. 어쩐지 그의 것일 것만 같았다. 방금 전까지 그의 생각을 하느라 이런 느낌이 든 것일 수도 있지만 그냥 왠지, 그럴 것만 같았다.


손을 뻗어 우편물을 꺼냈다. 보내는 사람 글자 아래 윤강현. 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세희가 전화번호도 바꾸었기에 이런 방식으로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아 매일같이 자신도 모르게 우체통을 유심히 들여봤던 것도 같다. 근데 이 주소를 기억할 줄은...


손이 부들거렸다. 그것은 공포와 설렘이 뒤섞인 떨림이었다.


세희는 이미 꽁꽁 얼어 말을 듣지 않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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