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눈부셔서 눈을 비비며 창문으로 다가갔다. 흑색에 가까운 회색빛 두터운 구름 사이로 찬란한 흰 빛이 정원을 내리쬐고 있었다. 큰 여닫이 창을 활짝 열어젖혔다. 흑백 배경 속 유일하게 색칠된 정원에서 노랗고 빨간 들꽃들이 만개하고, 옅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이질적인 두 색채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따뜻한 미풍을 느끼며 몸을 뻗어 발코니 아래 작은 정원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은은한 파스텔 색감 속에서 진한 파란색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작고 파란 나비가 꽃줄기를 타고, 흰 벽을 타고 올라오더니 금세 발코니 난간까지 날아왔다. 손을 뻗자 날갯짓을 차차 죽인 나비가 검지에 살짝 내려앉았다.
한 겨울에 이게 어떻게…
믿을 수 없어 눈을 깜빡인 순간 소용돌이 같은 바람이 아래 정원을 휩쓸었다. 노랗고 빨간, 여리고 작은 꽃잎들이 뜯겨 검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몸 위 얇은 슬립이 나부꼈다. 나비는 지키고 싶어 손을 감아쥐고 몸을 감쌌다. 손바닥 위 간질거림에 손가락을 살짝 피자 날개 찢긴 파란 나비가 손바닥 위에서 꿈틀거렸다.
안돼. 가지 마.
얼른 창을 닫고 실내로 들어서려 했으나 거센 바람이 손가락 마디 사이로 들어와 너덜너덜 해진 나비를 앗아갔다.
안돼. 가지 마.
벌떡 몸을 일으키자 시들해진 누런 잔디들과 삐쩍 마른 고목들이 보였다.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던 것들이었다.
흐릿해진 동공이 금세 초점을 잡았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돌아온 생시에서는 흰 햇빛 대신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방안을 비추었다.
아, 또 그 꿈이구나.
분명 안정기였다. 콩닥콩닥 뛰는 소리도 들어보았다. 미세한 움직임도 느껴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텅 비어버린 아랫배를 만져보았다. 허벅지를 흐르던 뜨끈한 액체를 잊지 못한다. 검붉게 물들어가던 흰 슬립을 잊지 못한다. 나는 그렇게 아이를 떠나보냈다. 고개를 돌려 옆에 누운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더 날카로워졌다. 살이 빠졌나. 한참을 바라보다 그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고 방을 나왔다. 거실에 놓인 피아노 앞에 천천히 가 앉았다. 악보도 정리해 버린 지 오래라 보면대는 텅 비어 있었다. 건반뚜껑을 열고 손을 올렸다.
띵-
차고 맑은 음이 푸른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건반우를 흐르던 손가락이 기억을 잃은 것처럼 딱 붙어 움직이지를 않았다. 몇 개의 낱건반을 의미 없이 눌러보다 눈을 감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잔상을 되새겨보았다. 오래전에 읽은 책의 내용처럼 희미한 기억들을 거슬러가니 화려한 무대 위 자신이 보였다. 그 위에서 찬란한 조명을 받으며 만들어가던 선율을, 박수소리에 벅차오르던 마음을 주체 못 해 흐르던 눈물을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인생에서 몇 안 되는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행복, 그래, 내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또 뭐가 있었더라. 아까의 잔향이 사라지기 전에 다음 건반을 눌렀다.
띵-
흐려져가는 음을 따라 기억의 시계를 되돌려보았다.
톡, 톡 빗방울이 머리 위 우산을 두드렸다. 어느새 기억은 그와 자주 만났던 정원으로 가있었다. 내가 사랑에 빠졌던 그날로. 고요한 겨울 강 같은 그의 눈이 내 얼굴을 훑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었다. 물방울이 떨어진 뺨 위로 손가락이 스쳤다. 음소거를 한 듯 빗소리가 작아졌다 커졌다. 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가 스치고 간 자리에 열감이 올랐다. 마치, 남은 물기를 다 증발시킬 듯 한.
그래, 내겐 그가 있었다. 그는 분명 내 옆에 있었다. 내가 무언가를 얻고 또 잃을 때도 그는 분명 옆에 있었다. 근데…
속이, 가슴 한가운데가 묵직하게 뭉쳐 들었다. 툭, 힘없는 손가락이 미끄러져 허벅지에 떨어졌다. 어느새 소리를 멈춘 피아노의 뚜껑을 닫고 그 우에 몸을 숙였다. 얼굴에 대인 차가운 향판이 금세 온도를 맞춰갔다. 순간 많은 것이 그대로인 듯, 전부 달라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처럼 단단하고 그래서 결코 부서지지 않을 것만 같은 그였으나, 예전과 같은 그는 아니었다. 그럼 뭐가 달라졌나.
어깨를 감싸오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 머리를 들자 몸이 그의 품 안으로 미끄러졌다. 그가 왔다. 익숙한 온기와 체향에 몸이 녹아내렸다. 그래, 이 눈빛, 이 온기였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이 단단한 몸과 온기에 기대 새 삶을 사려고 네 손을 잡았다. 그러나 뭐가 달라졌나. 애써 되돌린 기억의 시곗바늘을 놓았다. 본래의 흐름을 찾은 시간의 물살이 급류가 되어 휘몰아치는 사이에 터진 감정이 묵은 기억에 색채를 입혔다. 갑자기 밤처럼 깜깜했던 눈이 밝아지고 별로 보고 싶지도 않았던 것들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계속 외면할 수 있었더라면 딱 좋았을 것 같은, 그런 불가피한 인지.
너의 손을 잡고 사랑을 맹세하고 새 삶을 시작하려 했으나 난 늘 잃고 있었다. 엄마를 잃고 할머니를 잃고 아이를 잃고. 얻고 잃고, 얻고 잃고. 가파오르는 숨결이 목구멍을 메웠다. 그래, 너 하나밖에 없었다. 아가미가 없는 삶은 호흡을 위해 수중위로 떠올랐다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이 빌어먹을 뫼비우스의 띠 같은 순환 속에서 남은 것은 너 하나밖에 없었다.
호흡이 부족해 헐떡거리며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얼른 찾아야 했다. 내 전부이자 유일하게 남은 너에게서 찾아야 했다. 그 눈빛을. 내가 사랑했던 검고 짙은, 고요하고 단단한 눈빛과 앞으로의 내 삶의 희망을 찾아야 했다.
뺨 위로 물방울이 후두득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첫 기억 속의 우산을 두드리던 물방울처럼. 그러다 주룩주룩.
안돼.
그가 울고 있었다. 단단한 팔로 나를 감싸 안고 울고 있었다.
울지 마.
눈물범벅이 된 눈에서 내가 사랑에 빠졌던 그 눈빛을 , 그 남자를 찾아보려 애썼으나 깊은 골짜기에 남은 건 짙은 괴로움과 절망이었다.
또, 내가.
순간 잊고 있던 노래가사가 떠올랐다. ‘불행은 꼭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고 그럴 땐 정말 하늘에 기도하게 되지.‘
아, 그래. 내가 너를 내 삶에 끌어들여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채로. 맹목적으로. 알면서도 모르고자 했겠지. 내가 너를… 너를 사랑하여서. 속에서 무언가 뒤틀려가는 듯한 감정의 파고가 가슴속을 범람해 왔지만 잃음을 거듭하고 거듭한 끝에 도달한 결론은 명료했다.
역시 이렇게는 안된다. 그가 부서지고 있었다. 내 세상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피네. 이제라도 서로를 놓아주는 것. 이 끔찍한 악곡의 끝을 찍어야 했다.
여명이 사라지자 되돌아온 일상은 여전히 적막했다. 드셌던 아까의 파고는 어느새 잠잠해져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양. 강현의 목소리가 웅웅 귓전에 울렸다. 지친다는 양, 한숨과 함께 흘러나오던 말이.
' 흘러가는 대로 살아. 과거에 얽매인다고 바뀌는 건 없어. 언제까지 고여있을 건데? '
그래. 그 질긴 과거들을 다 잘라내야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받고 최선을 다한 거짓 속에서 평안을 찾으려 노력했던 나날들을, 정말이지 볼품없기 그지없던 나날들을 잘라내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좋은 시절에 만나 평범하게 시작한 여자와 남자를 그려보았다. 하지만 그 가정은 전제부터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이젠 알았다. 세희의 치열한 삶 어디에도 그런 시작을 할 수 있는 좋은 시절은 존재하지 않았고 강현의 고단한 인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렇게밖에 닿을 수 없던 인연이었다.
지난 시간을 다시 살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다가올 시간을 결정할 힘은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 기로에 서 있었다. 이제라도 서로를 놓아주는 것. 서로를 깎아먹지 않는 것. 결핍과 결핍은 결코 좋은 벗이 되지 못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연을 위한 최선의 결말을 세희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펜을 들고 편지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충동에 가까웠으나 어느 정도는 막연히 상상했던 행동이었다. 내가 너를 떠나, 우리가 새 삶을 시작하는 것.
눈에 보일 듯 안 보이는 그의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잠시 머무르다 갈 손님처럼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그러다 아이가 생겼을 때엔 나도 이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나 희망을 가지다가도 그 애마저 잃으니 그제야 도망치는 꼴이란.
곱게 접힌 편지지가 침대보 위에 놓였다. 그동안의 십 년이 허무할 정도로 순식간에 끝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