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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린serin Oct 19. 2024

프롤로그

현에게,


맹세의 말들을 기억해. 네가 나에게 해준, 내가 네게 해준 그 말들을.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던 밤들과 네가 건넨 모든 손들을 기억 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를 생각해. 증오 대신 사랑을 택한 할머니마저 잃었을 때 그만뒀어야 했을까? 아니면 그 바닷가 앞에서 네가 건넨 손을 잡지 말아야 했을까? 아니면 내가 늘 사랑을 갈망하며 살아와서 인 걸까? 비슷한 아픔은 서로에게 독이야. 왜 그걸 몰랐을까.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 너에게 갔으나 지금 보니 남은 건 지독한 허무함 뿐이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찾아온 깨달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널 원망하진 않아. 내 삶을 망치는 건 언제나 나였으니. 그래서 지나와버린 시간을 다시 살아갈 수 있다면 너를 절대로 만나지 않을 거야. 그 정원에 절대로 가지 않을 거야 피아노도, 우산도 그 무엇도 욕심내지 않을 거야.


그날, 피아노 앞에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손아귀를 보며 이제는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었어. 널 사랑하지 말아야겠다고. 사랑을 갈망하지 말아야겠다고.


널 원망하진 않아. 난 애초에 시작부터가 그릇된 사람이었으니. 돌아서서 걸어온 발자국들을 보니 내 삶은 끊임없는 불확실함 속에서 늘 뭔가를 잃는 중이었어. 난 그래도 너를, 너 만큼은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다 착각이었나 봐. 네 사랑이 어떤 형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마음이, 내 바람이, 내 사랑이 너에게 버거웠으리라는 걸 알아.  불확실한 누군가의 사랑을 갈망하는 것보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게 첫째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 이젠 더 이상 너에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긴 시간 동안 잡고 있던 걸 놓을게. 모든 게 내 욕심이었어. 미안해. 그래도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살아갈 수 있었어. 고마워. 이제 널 옥죄지 않는 삶을 살아.


널 사랑해서 좋았어.

잘 지내.



희가




희에게,


미루었던 말들을 하려 한다. 우선 감정 표현에 서투른 나를 용서해 주라.


난 네게 늘 서툴렀다. 어느 순간부터 감정이 메말라버려 사랑도 행복도 슬픔도 늘 한 순간 늦게 자각해 버린다. 넌 제일 큰 몸의 조각을 잃어버린 내게 처음으로 다가와 준 사람이다. 같은 종류의 슬픔이 독이랬나. 난 오히려 네가 나와 같은 아픔을 가져서 좋았다. 기복이라는 걸 몰랐던 심장이 널 보면서 뛰어도 보고, 내려앉았다 아려도 봤다. 네 앞에서 망가져도 보고 망가진 널 안아 줄 수 있어서 좋았다.


후회한다. 널 처음으로 가져야겠다 생각했을 때 바로 말했어야 했다. 네가 할머니를 잃었을 때 말했어야 했다. 우리가 그 아이를 잃었을 때 말했어야 했다.


널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난 늘 서투르다. 한 발자국씩 느리다. 이런 멍청한 나를 사랑한 네게 미안하다. 널 잃은 삶을 고칠 수가 없다. 의지도 방법도 없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본 시간들이 아름다웠다. 빌어먹을 과거들에 발목 잡혀 나아가질 못했다. 그 말이 뭐가 어려워서. 고작 말 한마디인데.


미안하다. 이제는 안다. 사랑이 무엇인지 후회가, 슬픔이, 갈망이, 행복이 무엇인지 안다.


사무치는 회한을 어디에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네 흔적들을 더듬어보았다. 하나 남은 피아노 앞에서 한참을 앉아있었다. 처음으로 마음에 담았던 음악을 떠올려보았으나 머릿속을 채우던 음표들이 이미 희미해져서 그마저도 잡을 수 없었다.


내가 그토록 경멸하던 짓을 네게 해버렸다. 이제 와서 하는 후회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가도 이대로는 둘 수 없어 집을 나와 한참을 헤매었다. 네가 좋아하던 꽃을 사들고서 자주 거닐었던 산책길을 찾았다. 그 길 우에서 한참을 울었다.


넌 네가 날 얽맨다 생각했으나 내 삶의 족쇄는 나 스스로가 채운 것이었다. 그까짓 과거들에 얽매여 널 잃을 수는 없다, 이렇게는 살 수 없다. 널 이렇게 보낼 수 없다.


우리 함께 허물어져버린 삶을 다시 세워보자. 내가 이번엔 너의 세상이 되어줄 테니. 그러니까, 다시 와주라. 용서해 주라. 널 사랑한다. 늘 사랑했다.


맹세의 말들을 기억한다. 절대 저버리지 않을 거라 다짐했기에 이번에도 다시 하려 한다.


내 손을 잡아주라. 내 발길은 언제나 널 향해 있었으니 이번엔 내가 너에게 갈 것이다.

넌 그 자리에 서있기만 하면 된다.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리며.




영원한 사랑을 담아,


(추신: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남은 것들을 다 정리하고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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