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하려고 PT까지 등록한 건에 대하여
운동화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는 게 달리기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늘 신던 러닝화 한 켤레로 시작했다. 나도 달리기 한다고 소문낸 지 한 달 만에 맞이한 생일, 가족과 친구들이 약속한 듯 러닝용품을 선물해 줬다. 러닝화, 골전도 이어폰, 러닝 모자, 에너지겔, 무릎 보호대, 기능성 양말…. ‘기능성’이라는 말이 기냥 붙은 게 아니었네. 새 러닝화는 가볍고 탄탄했으며, 러닝 모자는 바람도 잘 통하고 땀도 금세 말랐다. 무릎 보호대와 러닝 양말이 무릎부터 발목까지 단단히 지지해 주니 든든했고, 골전도 이어폰을 타고 흘러나오는 음악 덕분에 10킬로 달리기도 즐거웠다.
그러고 보니 생일에 받은 용돈 덕분에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비싼 브랜드에서 바람막이도 하나 사뒀다. 애들이랑 백화점을 가면 아무리 옷들이 누워있는 세일 매대로 유도를 해도 꼭 행거에 곱게 걸린 세일 안 하는 신제품을 고르고야마는 모습에 조용히 뒤통수를 째려보곤 했는데. 내 점퍼를 사면서 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 신상이 제일 예쁘더라. 최대 70퍼센트까지 할인택이 붙어있는 백화점 행사장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고르고 보니 하필 신상이었고, "이건 원래 세일 안 해드리는 건데 행사장에서만 특별히 10% 해드리는 거예요."라는 점원의 생색 아닌 생색에 속는 척, 웃음으로 답하며 카드를 넘겨줬다. 그러고서도 괜히 손해 본 느낌이라 사은품으로 양말에 파우치까지 챙겨 온 건 안 비밀.
아무것도 없이도 시작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없이 계속하다 보면 자꾸만 필요한, 아니 갖고 싶은 게 생기는 건 러닝도 세상 다른 일들과 똑같았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다 보면 내 책이 갖고 싶어지고, 책갈피가 필요해지고, 어느새 독서대와 독서용 전등과 북커버까지 검색하게 되는 그런 일들. 문진은 또 왜 이리 예쁜 게 많으며, 집에 사은품으로 받은 다이어리와 쓰다만 공책이 넘쳐나는데 필사는 꼭 폼나는 새 수첩에 하고 싶어 지는 건지. 그런 마음, 그런 현상은 러닝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대충 집에서 입던 낡은 반바지를 입고 뛰다가 '뛸 때마다 너무 휘감기고 불편해서 안 되겠는걸!'이라는 명분으로 쫀쫀한 스판 100, 5부 레깅스를 사 입고 뛰며 만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때 이른 강추위가 찾아올 것이라는 뉴스가 들려왔다. 잠깐만, 추워지면 나 뭐 입고 뛰지? 점퍼는 미리 사뒀다지만 그 안에 입을 긴팔 티는? 일반 면티는 땀나면 금방 식어서 추워질 텐데 러닝 전용 티를 사야 하는 거 아닐까. 더 추워지면 장갑에 귀도리, 털모자까지 필요하다던데. 집에 있는 두꺼운 패딩 말고 러닝용 경량 패딩이 있어야 할 것 같아. 한겨울에는 레깅스 위에 바지를 하나 더 겹쳐 입고 뛰라는데, 나 운동복 긴바지가 있던가? 한여름 러닝을 시작할 때는 대충 면티에 반바지를 입고도 큰 불편함이 없었다. 그런데 겨울 러닝은 왠지 철저하게 준비하고 달려들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위압감이 있었다. 어쩌나. 저 많은 아이템들을 다 구비해야 하는 건가.
누구죠? 누가 달리기는 돈 안 든다고 그랬죠?
사실 나는 겨울만 되면 곰이 된다. 동면하듯 집 안에서만 웅크리고 생활하는 곰의 시간. 아이들을 키우는 주부이자, 재택근무 하는 프리랜서다 보니 마음만 먹으면 일주일 동안 외출하지 않고도 생활이 가능하다. 그러나 곰의 시간은 언제나 무기력과 뱃살을 동반했다. 날이 추우니 외출을 최소화했고, 움직이지 않으니 몸도 마음도 둔하고 무거워져 이곳저곳 불필요한 군살이 붙었다. 그리고는 날이 풀릴 즈음에는 언제나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며 한숨쉬고, 후회하는 패턴의 반복 또 반복. 올 겨울은 그렇게 곰이 되어 보내고 싶지 않다. 겨울 동안 몸을 잘 만들어 놨다가 봄이 되면 벚꽃 날리는 트랙을 가볍게 달려보고 싶다.
고민 끝에 나의 선택은 월동 제품 쇼핑이 아닌 헬스장 등록. 집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위치한 24시간 헬스장. 스트레칭부터 러닝머신, 천국의 계단, 헬스 트레이닝, 필라테스에 샤워까지 원스톱으로 가능한 그곳. 게다가 영하의 날씨에도 여름 복장 그대로 운동할 수 있는 곳. 당장 월동 준비를 하지 않고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몸만 일으키면 언제든 가서 달리고 운동할 수 있는 헬스장과 함께라면 올 겨울은 곰이 아닌 경주마로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사실 경주마 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매일 꾸준히 산책 나가는 강아지 정도. 그 정도도 충분하다.
이왕 헬스장에 등록하기로 한 거 늘 숙제처럼 여겼던 근력운동도 시작해 보기로 결심했다. 다치지 않고, 오래 달리고 운동하려면 스트레칭과 근력운동은 선택 아닌 필수. 그걸 알면서도 방학 숙제를 미루는 아이의 마음으로 오랜 시간 근력 운동과 담을 쌓고 지내왔다. 혹자는 굳이 PT를 받지 않아도 그냥 홈트를 하거나 유튜브 보면서 하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이왕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김에 한 번은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다. 내 몸 상태에 대해서도 알고, 나에게 맞는 기구 사용법까지 배워두면 두고두고 알차게 써먹을 유용한 자산이 되어주리라는 믿음. 그런 믿음이 8년 만에 내 인생 두 번째 PT를 등록하게 했다.
오늘은 지난주 등록한 시범 PT 마지막 수업 날. 수업 시작 전 분명히 PT 연장 이야기가 나올 것이고, 몇 시간 뒤 아마도 나는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PT 계약서를 쓰고 있으리라. 두 달 전, 분명 '10분 운동'으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달리기 시작했고, 달리다 보니 더 잘 달릴 수 있는 몸이 갖고 싶어졌다. 무릎도 허리도 튼튼하게 단련해서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오래 달리고 싶다는 바람과 목표가 자라났다. 젊음은 돈 주고 살 수 없지만 근력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꾸준함'이라는 나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네, 달리기 돈 들더라고요.
패션러너 까지는 아니어도 아이템빨이란 건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걸 이제는 받아들였다. 폼나게 달리기 위해서가 아닌, 건강하고 안전하게 달리기 위한 쇼핑이라면 기꺼이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있다. 내 몸과 건강에 투자하는 비용과 시간은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운동의 근간이 되는 ‘근력 저축을 위한 비용 투자’, 이보다 더 가치 있는 러너를 위한 소비는 아직까진 찾지 못했다.
<브런치 동면 기간 동안의 운동 기록>
긴 연휴를 지나오며 가족들과의 일상에 집중하고 지내다 보니 브런치와 멀어져 버렸습니다. 한 달 가까이를 쉬고 말았네요. 다행히 브런치를 쉬는 동안에도 운동은 쉬지 않았습니다. 운동 덕분에 긴 연휴 중에도 생활 패턴도 컨디션도 크게 무너지지 않고 지나온 듯합니다.
이제 브런치 동면을 깨고 다시 달리는 삶과 쓰는 삶의 균형을 맞춰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