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의 번짓수를 잘못 찾았네
매년 건강검진을 가기 전 구구절절 작성해야 하는 문진표에는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해 나를 긴장시키는 질문이 있다.
'숨이 찰 정도의 운동을 일주일에 몇 번 하나요?'
: 0번 / 1~2번 / 3~4번 / 5번 이상
살짝 눈치 보다 1~2번에 체크를 하곤 했지만 사실 나의 양심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답은 0번이었다는 것을. 지난 몇 년간 내가 해온 운동들은 주로 요가, 필라테스, 걷기 같은 정적인 운동들이었다. 과식했거나 다이어트 의지를 불태우던 시절에는 때때로 실내 자전거를 타기도 했지만, 헉헉 숨이 차도록 페달을 밟기보다는 촉촉이 땀이 날 정도로 오래 타는 것이 내가 고수해 온 운동법이었다. 그 결과 운동을 열심히는 아니어도 꾸준히는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건강검진 체성분 측정 결과는 매년 대체로 비슷했다.
'체지방은 확 줄이고, 근육은 많이 늘리세요.
그러려면 주 2~3회 이상은 숨이 차고 땀이 날 정도의 운동을 해야만 합니다.‘
숨이 차고 땀이 날 정도의 운동. 수년간 흐린 눈으로 외면해 온 그 운동을 두 달 전 얼떨결에 시작하게 됐다. 마침내. 매일 산책하듯 걷던 길을 주 3회 이상 뛰기 시작한 것이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틈만 나면 찾아본 영상 속 러닝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달리면 분명 살이 빠진다고. 건강과 몸매를 한 번에 챙길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솔깃한 경험담인가! 이왕이면 지방이 잘 탈 수 있게 공복 러닝이 더 효과가 있겠지? 빈속에 뛰는 게 몸도 가벼워 더 잘 뛰어질 테니 아침 먹기 전에 꾸준히 뛰어보자. 그렇게 나의 공복 달리기는 ‘건강과 다이어트’라는 야망을 품고 얼마간 계속되었다.
그런데 공복 러닝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달리고 난 뒤에 입맛이 두 배, 세 배로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특별히 가리는 것 없이 뭐든 맛있게 잘 먹는 나인데, 빈속에 운동까지 하고 왔으니 말 그대로 시장이 반찬이라고 뭘 먹어도 꿀맛이었다. 별다른 반찬 없이도 한 그릇 꾹꾹 눌러 담은 밥을 맛있게 싹싹 긁어먹고도 아쉬워 입맛을 다실만큼 식욕이 좋아졌다. 살찔까 봐, 소화 안될까 봐 자제하던 디저트류도 별다른 죄책감 없이 맛있게 먹었다. 안 하던 유산소 운동을 30분도 넘게 했는데, 이 정도는 먹어줘야 체력이 버티지! 내가 흘린 땀이 얼만데 이 빵 하나를 못 태우겠어? 공복에 유산소 운동을 하면 몸이 하루 종일 열량을 태운다잖아. 괜찮아, 괜찮아. 꼭꼭 씹어서 잘 챙겨 먹자. 어차피 내일 또 뛸 거니까!
즐겁게 뛰고, 행복하게 먹었다. 그래도 먹는 양보다는 운동량이 많다고 믿었다. 어떤 주에는 거의 매일 공복에 30분 이상을 뛰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했다. 몸무게가 왜 그대로지? 어라? 오늘은 심지어 늘어있네? 이대로 가다간 건강한 돼지를 면치 못하겠다 싶은 경각심에 초조해질 무렵 한 썸네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https://youtu.be/K65zl6qQjyw?si=JuUNIbhmCNZ-iwcS
<노력할수록 안 빠지는 여자의 몸>이라는 제목의 이 영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살 빼려면 힘들게 운동하고, 조금만 굶으면 돼!’
이거 남자들 몸에는 통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자들 몸에는 전혀 다릅니다.
다이어트할 때 남자의 몸에서 안전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여자의 몸에는 안전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성들이 체중을 감량하기 위해선 먼저 그들의 몸이 지금 안전한 상태라고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운동과 다이어트를 열심히 하면 할수록 우리 몸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을 높이고, 이는 몸에게 ‘안전하지 않다’는 신호를 더 많이 보내게 만듭니다. “
안전하지 않은 위기상황에서 여자의 몸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비상 시스템, 즉 ‘지방을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기.’를 가동한다는 것이다. 맙소사. 게다가 코티졸은 식욕 조절도 어렵게 만든다고 하니…. 나 열심히 운동해서 입맛이 좋았던 게 아니었던 건가 혹시? 잠자고 쉬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공복 상태로 ’열심히‘ 달린 게 어쩌면 나의 건강도 다이어트도 모두 방해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열심히 한다고 다 좋은 건 아니었구나.
충분한 휴식, 적당한 양의 건강한 식단,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의 강도로 꾸준히 달리는 습관. 이 삼박자가 모두 갖춰져야 건강함과 날씬함은 물론 ‘오래 달릴 수 있는 몸’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열심히 시행착오를 거치고 난 후에야 조금 알겠다.
요즘 나는 달리기 전 간단히 아침을 먹는다. 바쁘고 번거롭다는 이유로 거르기 일쑤였던 끼니도 삼시세끼 꼬박꼬박, 건강하고 균형 있게 챙겨 먹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수면 또한 최소 6시간은 잘 수 있도록 노력한다. 쓰고 보니 나 또 ‘열심히’ 하는 중이네. 하지만 이 노력들은 나를 채찍질하거나 몰아세우기 위함이 아닌 ‘편안하고 안전한 상태’로 운동하기 위해서다. 이제 열흘 정도 시도 중인 이 변화가 아직까지는 나의 생활패턴이나 컨디션을 극적으로 개선해주진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동안 잘 느끼지 못했던 배고픔과 피곤함에 민감해졌다는 것이다. 세끼를 챙겨 먹은 이후로는 거의 매일 배 고픈 상태로 잠이 들고, 다시 배고픈 상태로 깨어난다. 밤 11시쯤 되면 걷잡을 수 없이 졸음이 몰려와 모든 걸 뒤로 하고 침대에 눕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내겐 큰 변화다.
물론 이 변화가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변화로 이어질지 아닐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예로부터 잘 먹고, 잘 자는 것만큼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일은 없다는 사실 아닐까. 날씬해지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건강하게는 살고 싶다. 뛰고 싶을 때 뛰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이제는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오늘의 운동 기록>
- 가볍게 걷기 7,000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