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를 잃은 어미로 집에서만 칩거 생활을 한지가 두 어달은 되는 때였다. 계속 울기만 하고, 웃지도 않고, 친구도 안 만나고, 엄마와 남편 외에는 전화도 받지 않고. 이런 날이 이어가던 중 우리는 싸웠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되었다. 평소 같으면 넘어갈 일인데, 남편이 틱틱거리는 말투로 나에게 말을 했다는 것이 싸움의 불씨였다.
유산이 당신 탓이야?
아니. (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그런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내가 집에만 있었던 이유는 생각해 보면 내가 가진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때 감기가 걸렸을 때 병원에 갔었어야 했는데, 배가 안 좋으면 기다리지 말고 병원에 갔었어야 했는데,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이런 아쉬움과 후회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화살은 삐뚠 방향으로 휘어서 기어코 남편에게로 향하고야 만 것이다. 나는 점점 더 예민해져 갔고, 사소한 작은 일도 그냥 넘어가지를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세상에서 나보다 더 슬픈 사람은 없는데 당신이 나에게 잘해줘야 하는데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강같이 잔잔한 사람으로 나에게 진심으로는 싫은 소리를 잘 안 하는 남편이지만, 인내심에 한계를 보인 남편은 참다 참다 드디어 속내를 내비치었다.
나도 힘들어
결혼 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이런 말은 내가 해야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애는 잘 커? 언제 낳아? 이런 말이 인사라고 했다. 천안에서 청주로 결혼을 한 나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청주 토박이인 신랑은 발바닥이 많이 넓어서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 많은 지인들에게 한 명, 한 명 다 유산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했다고 한다. 우리는 쌍둥이 중 한 아이가 8주에 유산, 20주에 유산을 했으니 두 번을 겪었다고 한다. 난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아이아빠일 뻔한(?) 그도 많이 힘들었던 것이다.
사람이 이런가 보다. 내 아픔만 너무 크게 느껴지는 바람에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 밖에서 겪고 있는 생채기를 감히 나는 눈치도 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보듬은 우리는 그 뒤로 좀 더 단단해졌고, 두 번째 시험관아기 시술을 하기에 이른다.
유산 후 가족들은 우리에게 전화하는 것도 조심스러워했고, 가족과의 소통은 점차 단절되기 시작했다.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변 사람들의 임신과 출산은 나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