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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함까지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기쁜 소식이 나에게 와서 배가 되길.

by 병 밖을 나온 루기

오늘 하루, 일상을 보내는 틈틈이 어떤 글을 써볼까? 고민했지만 지금 이 시간까지 제대로 써 내려가지 못한 걸 보면, 역시 매일 글쓰기란 만만한 도전이 아니다. 어쩌면 좋은 글을 길게, 또 유려하게 적고 싶다는 욕심이 앞서서일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갖추지 못한 능력에 대한 욕심은 내려놓기로 했다.


브런치 서랍을 뒤적뒤적.

떠오르는 생각을 붙잡아, 녹음해 둔 음성을 뒤적뒤적.

하나의 키워드를 정해보았다.


겸손함.

겸손한 척.


나는 자랑이 하고 싶다. 하지만 겸손한 사람이고 싶다. 겸손해야 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왔으니까.


내가 떠벌린 자랑 끝에 원치 않은 시기와 질투가 따를 수도 있고, 타인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리고 자랑하는 꼴이란 대체로 보기 싫은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자랑을 삼킨다.


내가 사는 동네에 집 값이 한창 들썩이던 때가 있었다. 새로운 대단지 아파트가 연이어 분양되고, 건물이 속속 지어지던 그 무렵. 이사를 꿈꾸던 내게 선물처럼 '청약 당첨'이라는 행운이 왔다. 소식을 접한 날, 들뜨는 마음을 도무지 주체하지 못할 만큼 기뻤다. 당장 동네에 플랜카드라도 걸고 싶었다. 다음날 지역 신문에 기사도 내고.


"저 분양 당첨 됐어요! 로열동 로열층이에요. 동네 사람들, 저 진짜 너무 기뻐요.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동네 다수의 이웃들이 나와 같은 꿈을 꾸었기에, 나의 청약 당첨은 간절히 원하던 다른 이의 실패감으로 돌아올 수 있을 터였다. 남편은 내게 입을 다물기를 추천했다. 그렇게 나는 자랑을 삼켰다.


물어오는 지인에게만 조심스레 당첨을 알렸을 때, 진심 어린 축하를 받았다. 하나같이, 덩달아 기쁘다며 넓은 도량을 꺼내어준 지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내가 겸손하다는 걸 자랑하고 싶다.


5학년이던 딸이 전교여부회장 선거에 나간 적이 있다.

내가 학교에 다니던 때의 전교회장은, 백화점에서 산 것 같은 곤색 벨벳 정장에, 흰 셔츠, 넥타이를 매고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부잣집 아드님이었다. 자식이 반장만 해도 육성회비를 반강제로 내야 했던 시절. 학교 전체를 대표하는 그는, 내 눈에 퍽 특별해 보였다.


전교 임원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아이가 기특하고, 신기하면서 대견했다. 내가 그토록 멀게만 느꼈던 자리에 당당히 도전하는 모습을 보며, 어쩐지 어린 시절 나의 열등감마저 녹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선거 피켓 만들기와 공약 만들기, 또 선거 운동 등 신경 쓸 일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그 해 선거에서 당선되지 못했다. 이듬해 딸은 다시 출마를 선언했다.


"기특하구나, 다시 도전을 결심하다니 멋지다 딸아."

그렇게 말하고 나는 그대로 눈을 질끈 감은 채, 소파로 몸을 던졌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또 시작이구나...'


다행히 이전과 다르게 엄마인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그저 연설문을 함께 연습해 보는 정도였다. 피켓 만들기와 포스터 만들기, 홍보영상 만들기까지 딸과 친구들이 알아서 준비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꽤 즐거웠다. 물론, 내가 하지 않아도 되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마침내 딸은 전교생 1700명이 넘는 학교의 6학년 전교 여부회장이 되었다.

마치 어린 시절 나의 동경을 채우듯 기뻤다. 자랑하고 싶었다. 아파트 광고판에 전단지를 붙이고 싶었다. 인스타그램에 딸이 교장선생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고 싶었고, 카카오톡의 프로필 사진을 딸의 임명장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해 1학년 입학식날, 교장선생님의 전교 임원단 소개 앞에 '멋진 선배들'이라는 수식어에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이야 말로 자랑을 삼켜야 할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나, 내가 떠벌린 아이의 감투가 아이의 족쇄가 될까 두려웠다. 나의 지나친 기쁨이 아이에 대한 미움이 되어, 보이지 않게 떠다니다 조금이라도 아이에게 해가 될까, 염려되었다.


그렇게 나는 짐짓 겸손한 척을 했고, 종종 자랑을 삼켰다.




지금의 나는, 다른 이의 기쁜 소식에 덩달아 기쁘고 진심으로 축하의 마음을 건네는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의 소식에, 내 안의 결핍이 건드려지지 않아야 하고, 내 안의 자격지심이 없어야 한다.


이는, 글을 쓰며 얻은 것이다. 글 속의 나를, 한 발 떨어져 바라보며 결핍이 치유되고, 자격지심이 사라진다. 나의 좋은 소식에 덩달아 기뻐해주는 고운 마음의 글 벗들을 닮아, 나 역시 그런 진심이 우러난다.


타인이 나누어 준 기쁨이 나에게 와서 배가 되고, 진심이 담긴 다정한 축하를 건네는 내가 되는 것,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바다.


참, 그리고 이 글은... 겸손한 척을 한 과거의 나까지 포함된 자랑 글이 아닐 수 없네요. 부디 너그럽고 따스한 마음을 내어주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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