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게 빛나는 날.
고등학생 때, 친구들은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 속 밥을 한 숟가락 뜨며 말했다.
"나는 결혼 안 할 거야. 평생 혼자 살 거야."
그때는 지금처럼 비혼이 흔하지 않던 시기였기에, 결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 속에서도 친구들은 자신의 특별함을 뽐내듯이, 지키지 못할 독신을 선언하곤 했다. 나는 그런 친구들 사이에서도 꼭 결혼하겠노라 말했다. 아이도 꼭 낳고 싶다는 말도 덧붙이며.
결혼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아기천사가 찾아왔다. 천사는 6주도 되지 않아 자신이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잠시 뱃속에 품은 아기를 잃은 슬픔은, 돌아보면 오히려 그때 당시에는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진짜 괴로움은, 이후였다. 원하던 임신이 되지 않는 시간들이 길어지며 깊어져갔다.
일반적으로 만 1년간 피임 없이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했음에도 임신이 되지 않을 때를 ‘불임’이라고 한다. 임신을 위해 산부인과를 다니는 1년 동안, 의사는 나에게 '불임'이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매달 기대했고 매달 실망해야 했다. 12번 이상 반복된 실망은, 간절한 사람에게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친구들이 하나둘 임신 소식을 전해 올 때면, 가슴 시린 부러움을 맛보아야 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맘스홀릭’이라는 네이버 카페에 들어가, 임신과 출산, 육아와 관련된 글들을 끝없이 읽었다.
그러다 급기야, 길에서 마주치는 임산부만 봐도 화가 났다. 배를 쑤욱 내밀고 걸으며
"너는 아기 없지?"
라고 나를 놀리는 것만 같았다.
유산 이후, 몸 여기저기에서 탈이 났고, 결국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게 되었다. 아이가 없는 전업주부는 동네에서 친구 한 명 사귀기 쉽지 않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낮에는 직장에 있었고, 또는 육아에 바쁜 엄마들이었다. 마치 '취업 준비생'처럼 나는 '임신 준비생'이었다. 하루가 참 무료했다. 시간은 흐르는데 나만 멈춰 있는 것 같았고, 세상에서 전혀 쓸모없는 잉여인간인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임신테스트기에서 두줄을 보았다. 별 기대 없이 해본 테스트기에서 빨간 두 줄이 번지는데, 내 눈에도 벌겋게 눈물이 번졌다.
그날은 길었던 장마가 끝나고 찬란한 햇빛이 우리 집으로 환하게 들어오던 날이었다. 그래서 아이의 태명을 '햇살'이라고 지어 주었다.
한 해전, 너무 이른 시기에 병원을 가서 임신을 확인하고 유산을 겪었기에, 이번에는 집에서 최대한 버텨보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불안했다. 임신이 아니면 어쩌지? 다시 유산되면 어쩌지?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끙끙대는 동안 나는 매일 테스터기를 하나씩 썼다. 15개쯤 쓰고 나서야 병원에 갔다.
처음으로 아기집을 보고 심장 소리를 들었던 그때의 감격이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때의 임신기간에 대해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전까지 내가 살아온 모든 기간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아기를 품은 이후의 나의 시간은, 뱃속의 아기를 키워내는 시간이었다. 지역 임산부 모임에 들어가 '몸매 망가질까'하는 걱정 없이, 식욕에 따라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다녔다. ‘결혼은 했지만, 직장도 없고 아이도 없는 사람’의 모임이란 없었기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보내던 무료한 시간은, 드디어 끝이 났다.
소형 가전 하나를 사도 사용설명서를 읽게 되는데, 이토록 귀한 생명을 세상에 내놓아야 하니 육아서를 읽기 시작했다. 아이를 위한 100일 일기도 쓰기 시작했다. 매일 빠짐없이 100일의 일기를 적으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주는 곳이 있었다. 나는 평소에 계획적이지도, 꼼꼼하지도, 꾸준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것만큼은 끝까지 해냈다. 내가 써 내려간 100일이 한 권의 책이 되어 돌아온 순간, 참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조리원에서 남편은 집으로 배달 온 그 책을 내게 건네며, 본인도 읽고 울었노라 고백했다.
예정일을 나흘 앞두고 양수가 터졌다. 그렇게 입원을 하고 촉진제를 맞으며 유도 분만을 하게 되었다. 평상시 생리통도 없던 내게, 생리통의 100배라는 출산의 고통, 그게 뭐 어떤 건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서서히 진통이 시작되었을 때, 무거운 배를 안고 산부인과 안을 걸어 다니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임산부들이 이 아픔을 겪고 애를 낳는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데!'
머릿속으로 내가 아는 모든 임산부들을 향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고, 이미 아기를 낳은 사람들에게는 존경의 마음이 들었다. 자궁문이 겨우 20프로 열렸을 때도, 이건 도저히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아픔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뒤로 더 엄청난 진통이 몰려왔다.
출산을 앞두고 내 안의 다짐이 하나 있었다.
"아이도 산모도 위험하니 제왕절개 합시다."
이 말이 의사의 입에서 먼저 나오기 전에는, 절대 내가 먼저 수술하겠다고 말하지 않겠노라는 결심이었다.
오전 9시에 병원에 도착했다. 만약의 수술을 대비해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로 진통을 견뎠다. 진행은 느렸고, 진통하는 시간이 길어졌건만 의사는 끝내 내게 수술을 권하지 않았다. 밤 10시가 되어, 나는 마침내 자연분만을 해냈다.
진통을 견디는 동안, 나라는 사람을 돌아보게 되었다.
'공부 안 한 것 치고는 성적이 괜찮네.'
'연습 안 한 것 치고는 잘했어.'
'최선을 다하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괜찮아.'
돌아보면, 나는 언제나 도망칠 구멍을 만들어 두고 살았다. 핑계, 변명, 실패로부터 도망칠 곳을 마음 한켠에 마련해 둔 채, 뭔가를 했다.
우습게도, 나는 최선을 다 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걸 걸고도 실패했을 때, 그 절망감과 사람들의 비웃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출산은, 처음으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쏟아부으며 진심으로 최선을 다한 순간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엄청난 고통을 참아낸 결실로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았다. 생애 첫울음을 울던 아가는 내 배 위에서 나의 목소리를 듣고 신기하게도 울음을 멈추었다.
"햇살아, 엄마야. 고생 많았지. 너무 반가워. 세상에 나온 걸 축하해. 사랑해 햇살아."
그 순간 나는 마치 전교 1등, 아니 전 세계에서 챔피언이라도 된 것 같은, 깊은 성취감과 뜨거운 뭉클함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세상에 없던 새로운 사람을 내 안에 품고, 세상에 내보내는 일. 그 모든 과정과 그 순간은, 내가 기억하는 내 삶의 가장 찬란한 순간이었다.
물론 그 이후로는 수유와 현실 육아가 시작되며, 단짠단짠 한 하루들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주는 기쁨은, 이전에 없던 행복이다.
나의 화양연화를 이렇게 글로 남길 수 있는 지금이, 어쩌면 남은 내 생의 새로운 화양연화의 시작이 아닐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