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 풍경 -
보라색을 좋아한다.
보라색이라는 표현은 순우리말인데, 영어로는 purple, violet이라고 한다.
퍼플은 붉은 빛이 더 강한 보라 자주색이고, 바이올렛은 푸른빛이 더 강한 보라 청자색이다.
흰 색 빛이 더 나는 보라색은 라일락(lilac), 라벤다(lavender)로 불리기도 한다.
보라색을 영어로 violet 이라고 하는데, 제비꽃은 viola mandshurica이다. 그러고보니, 색 이름은 자연물을 표현하기 위하여 나왔을까? 특히 꽃이나 식물의 색을 표현하고 있다. 봄이면 땅에서 올라오는 보라색 무스카리도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인사동 거리를 걷다가 문득 보라색을 띤 스카프를 보고 생각나는 사람이 나였다고 했다.
가르치는 일에 진심이셨던 선생님이 퇴직하시고 인사동에서 청자색을 띤 바이올렛의 실크 스카프를 보고 나를 떠올려주셨다. 그렇게 보라빛 스카프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나에게로 왔다. 기쁨과 감사함으로 행복한 감정이 온 마음에 일렁였다. 의미를 담은 물건을 만지고, 착용하고, 사용하는 순간은 세상 어떤 좋은 것보다 더 애틋하며 특별하다.
그 특별한 보라빛 스카프를 두르기 위해 나는 올해 봄을 기다린다.
겨울이 길어지면 봄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올해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더욱 더 그렇다.
나는 지금 더욱 봄을 기다린다.
시간이 지나야 끝나는 일이 있다.
우리 학교는 작년 겨울방학을 시작하자마자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바로 석면 해체 제거 공사다. 석면은 호흡을 통해 흡입하면 폐암 등을 유발하는 1급 발암물질이라서 모든 학교에서 석면이 천장재로 붙어있으면 이것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학교 천장 마감재로 석면이 그대로 있으면 낙후된 교실 및 교무실 환경이라도 아무 것도 건드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단지 언제 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빨리 공사를 진행할수록 개운하고, 학습환경이 좋아질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 일이니 하루빨리 해야 하는 일이다. 학생들과 교직원이 불편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안타까우나, 감수해야 하는 피해갈 수 없는 정면돌파만이 남았다. 피할 수 없으나, 석면 공사 학교에 근무하는 일이 두번째이니 아득한 낭패감을 느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받아들이는 수 밖에..
학교는 방학이면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없는 기간이라서 이 시간에 밀린 숙제를 하듯 환경을 개선하는 여러 사업들이 진행된다. 화장실 리모델링, 창호 교체, 페인팅, 도서관 및 체육관 리모델링, 잔디 운동장 조성 등 다양한 이름의 공사판이다.
석면 해체 제거 공사는 2027년까지 모든 학교는 무석면 구역으로 청정 학습공간을 지향하는 것이 목적이다.
공정을 단순하게 말하면 천장에 붙어있는 석면 보드판을 떼어내고 새로운 천장재를 붙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단순하지 않다. 석면 가루가 어디에도 떨어지면 안되기 때문이다.
학교의 모든 기물을 별도의 공간으로 옮겨야 하고 다시 들여오는 이사 작업이 엄청난 일이다. 우리 학교는 체육관 건물이 있어서 이 곳에 모든 물건을 쌓아 올려서 보관했는데, 집기류 양이 너무 많아서 더 적재할 수 없었다. 학교 건물 외부 보도블록에 임시 텐트를 치고 그 곳에도 물건을 적재할 수 밖에 없었다.
석면 공사를 진행하는 70~80일의 여정은 한 편의 드라마다. 이사가 모두 끝나면 사전청소를 하고 이제는 학교 내부 건물에 비닐 보양을 씌우고, 음압장치를 설치하고나서야 천장의 석면 패널을 떼어낼 수 있다. 공정 사이에 청소와 감리, 석면농도 측정 작업은 필수이다. 작업이 끝나면 다시 천장재를 부착하고, 조명도 형광등에서 LED 등으로 모두 교체한다.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학교에 투입된 대략 15개의 업체가 서로 일정을 조율하여 맞물려 돌아간다. 한 업체가 공사 시기를 맞추지 못하면 다른 업체의 공사가 또 밀리게 되는 도미노이다.
지금은 교육청과 학교가 함께 공사를 진행하여 학교부담이 많이 줄었지만, 모든 공사 진행을 담당하는 행정실 부서는 그야말로 업무 폭탄을 맞는다.
사람들에게 그저 얻어지는 것이 없다.
저절로 좋아지는 것도 없다.
수많은 작업자의 노고와 고생으로 정말 짠하고 새로운 학교 환경의 세상이 광명처럼 나타난다.
일단 공사 완료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니, 그야말로 감개무량하다.
돌아온 것만도 어딘가 싶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라는 말이 맞다.
이왕 모든 학교의 기물이 빠져나온 김에 버려야 할 물건을 폐기 처분하고, 지금까지 숙원사업이었던 공간재구조화 사업까지 동반하니, 정말 끝이 없었다.
이제 3월 4일이면 개학이 다가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아직도 작업 공정 일부는 끝나지 않았지만, 개학을 해야 한다.
이사로 나간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고, 수업과 업무를 할 수 있는 환경으로 다시 세팅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말 그대로 벌집이 쑤셔놓은 상황이다. 없어진 기물을 찾는다, 책상이 망가졌다, 전기가 안들어온다, 전화가 안된다, 난방이 안된다, 방송이 안나온다, 인터넷 선이 연결이 안되어있다, 전등이 안들어온다, 공기청정기가 없다, 커튼이 없다, 버티컬을 교체해야 한다, 파티션이 없거나 잘못 설치되어 있다, 책상을 바꿔야 한다, 협의회 테이블이 필요하다, 벽면을 보수해야 한다.
다시 보니, 학교 건물에 이렇게나 많은 집기류와 냉난방, 수도, 전기, 통신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었는지 새삼 놀라울 뿐이다. 교실에는 책상과 의자, 칠판, 사물함 외에도 요즘에는 공기순환기와 태블릿 보관함이 설치되어있다.
선생님들이 근무하는 교무실에도 사무 책상과 의자, 전화기, 서류 보관장은 물론이고 탕비시설과 공기청정기, 정수기, 회의 테이블과 의자 등이 필요하다.
무엇이든 이 또한 지나가고, 모든 것은 끝이 있다.
보라색 제비꽃과 무스카리를 기다리면서 이 봄을 맞이하고 싶다.
3월 4일 개학을 앞두고 멀리 남쪽 담양을 다녀왔다.메타쉐콰이어 가로수길을 걷는데, 봄비와 같은 이슬비가 내렸다. 나무 끝이 살짝 분홍빛을 띤다. 봄인가싶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싸라기 눈이 내린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그렇게 긴박한 불협화음과 같은 박자를 들려주는 것이 공감된다.
이 봄은 수많은 좌충우돌을 겪고 다가온다.
봄이다.
이 봄에 보라빛 스카프를 곁에 두고 있다.
스카프를 두르고, 봄을 즐기러 새싹같은 아이들이 있는 학교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