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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술을 좋아합니다

주정뱅이는 아닙니다

by 세인트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딱 스무 살 때부터이다.


캠퍼스 잔디밭에서 막걸리로 시작했던 신입생 환영회.

낭만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 순간에도 이성을 쫓는 눈알은 쉼 없이 돌고 있다.

그래서 더 빨리 취해버리는 막걸리 한잔이었다.


수업이 모두 끝나가는 오후.

낮동안 햇살로 데워진 잔디밭에 대충 앉아 마셨던 막걸리는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찌릿함과 동시에,

몸이 통째로 붕 뜨는 마술을 부렸다.


그 후로 나는 술과의 인생을 2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단, 법과 원칙의 테두리를 벗어난 적은 없다.)


대학교 1학년 98년도.

학교 앞 '하이트' 술집.

직관적이게도 맥주 브랜드를 가게이름으로 내걸고

대학생들의 코 묻은 돈을 쪽쪽 빨아가던 추억의 술집.

최악의 주사(酒邪)라고 불리는 '맥락 없이 울기'를 시연하던

나는 술만 마시면 갑자기 눈물을 쏟아냈다.

술 한 잔, 눈물 한 모금, 술 한 잔, 눈물 한 모금.......

이유가 있었다.

짝사랑하던 동기 녀석이 딴 계집을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 녀석과 늘 붙어 다녔기 때문에 결국 내가 쟁취했고,

감쪽같이 주사는 사라졌다.





돈을 벌기 시작한 2004년.

어스름 해가 뜰까 말까 하는 이른 아침에 출근을 해서,

모든 이들의 책상과 응접 테이블을 닦았다.

쓰레기통은 왜 각자 하나씩 갖고 있는지, 시키지 않아도 비워내며,

마지막으로는, 가장 높은 분의 재떨이와 책상 밑을 정비했다.


오후 6시가 되어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좀 더 어두워져야 한다. 더 어두워져야 당당하게 움직인다.

7시쯤, 생기라곤 없는 남자들을 따라 저녁을 먹으러 갔다.

여름만 되면 멍멍탕, 수육, 전골 종류별로 먹었다.

부추를 잔뜩 곁들인 멍멍이 요리들에 소주를 마셔댔다.

일을 하려고 남은 건지, 소주를 마시려고 남은 건지 나에게는 지독히 어두웠던 나날들이다.

그 모든 어두움을 뒤집어쓰고, 장트러블을 달고 살았지만 술을 거절할 순 없었다.

높은 분의 더 높은 분과 회식을 하는 날에는,

더 높은 분의 양 옆으로 당연한 듯 여직원들이 껴앉아야 했다.

소주는 '하나! 둘!'의 박자에 맞춰 원샷을 때려주고,

그들 앞에 안주가 떨어지지 않게, 술잔이 비워지지 않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나는 그렇게 또 다른 술 문화에 젖어들었고, 뒤집히길 반복하던 장기들은 단련되었다.




그 정도 했으면

술이라면 지긋지긋할 법도 한데,

내 몸속에 흐르는 주당의 핏줄기는 거부할 수 없나 보다.

나는 근본적으로 술을 좋아하는 편이다.

아빠의 술 사랑을 이어받은 것 같다.

사주쟁이는 조상 중에 술독에 빠진 사람이 아빠어깨를 누르고 있단다.

핏줄이야 어떻든,

모질었던 술강요의 터널을 지나고, 내 맘대로 즐길 수 있는 세상이 왔다.

술을 강요하는 상사를 이겨낼 만큼 나이도 먹었다.


요즘 퇴근 후, 차려 낼 저녁 메뉴에 따라 술을 고른다.

술이 주는 자유는 달콤하다.

다양하게 빠져드는 취미 생활 중에 하나라고 보면 된다.

즐길 수 있는 술은 결코 중독자로 만들지 않는다.

더욱 맛있고, 건강하게 즐기기 위해 매일 새벽을 달린다.

몸이 거부하는 날은 절대 마시지 않는다.


술을 좋아한다는 고백이 부끄럽지 않게 단디 살아가야겠다.





최고의 경지는 즐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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