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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봉봉 Nov 29. 2024

적도의 낭만 말라카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더니 말레이시아에 와서 말라카 투어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평일에 쇼핑몰만 찾아다니며 관광 아닌 관광을 다녔는데 쿠알라룸푸르를 벗어나 말레이시아의 진면목을 본다는 생각에 약간 들뜨기도 했다.


말라카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왕자가 말레이시아라는 나라를 처음으로 세운 역사적인 곳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 같은 곳이라고 할까. 말라카 해협을 끼고 있어서 동양과 서양을 잇는 해상교역의 요충지로 제국주의 시대 열강의 침략이 끊이질 않았던 곳이기도 하다. 


중동지역과 교역을 시작하며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기도 했고, 명나라 정화의 대원정 이후 최초의 차이나타운이 생긴 곳이기도 하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일본이 식민지배를 했던 역사로 말라카 전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결론적으로 말라카는 말레이시아의 역사 그 자체이며 세계적인 관광지이자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가 모자이크 된 거대한 예술 작품 같은 곳이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니 그리 멀지는 않다. 오전 일찍 출발해 휴게소에서 간단한 간식도 먹었다. 생각보다 휴게소가 쾌적한 데다 도넛, 아이스크림, 샌드위치 등 글로벌한 브랜드는 다 입점해 있어 놀랍기도 했다. 


적도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비가 올까 걱정했는데 무덥지만 쾌청해서 좋았다. 땀이 줄줄 흐르는데도 신기하게 그늘 아래에서 바람을 맞으면 또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말라카는 아담하고 오밀조밀한 매력으로 가득한 소도시였고 예스러운 멋과 유로피안의 감성이 풍성한 휘핑크림처럼 도시를 감쌌다. 



명나라와의 교역으로 생긴 청훈텡 사원은 유교, 불교, 도교를 모두 한 곳에 모아 놓은 사원이었다. 명나라 사절단으로 온 그 시절 사람들의 바람과 자취가 묻어 있는 신성한 공간이기도 했다. 향을 피우며 경건하게 기도하는 사람들과 무심하게 바닥을 쓰는 관리인, 분주하게 실내를 오가는 관광객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15세기 명나라 사원에 다양한 피부색의 현대인들을 포토샵으로 오려 붙여 넣은 것 같았다. 아니 우리가 잠시나마 과거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 같기도 했다. 


골목길 사이마다 카페와 작은 가게를 맞닥뜨리곤 했는데 유명 관광지인데 반해 한가한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오래된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초록색 담쟁이와 가게 앞의 작은 화분들, 벽면을 장식한 예술가의 거친 붓질, 동양식 기와와 서양식 창문이 같은 건물에 공존하며 새로운 감성을 창조해 냈다. 

쿠알라룸푸르의 크고 높은 건물이 연달아 복사 붙여 넣기 하며 글로벌한 도시임을 자처하며 뽐내는 것 같았다면 말라카의 아기자기한 모습은 아줌마의 감성마저 울리는 오래된 새것으로 가득했다. 




적도의 뜨거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모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이내 아이들의 발걸음도 점차 느려졌다. 골목을 지나고 천변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네덜란드 광장이다. 심한 갈증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카페에서 수박 주스를 주문했다. 허리까지 오는 깊은 고무 물통에 얼음을 동동 띄우고 럭비공만 한 수박을 가득 담아 놓았다.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마다 작게 구멍을 만들어 빨대를 꽂아주는 진짜 수박주스다. 



오이, 수박 냄새를 싫어하는 셔니도 갈증에 목이 탔는지 벌컥벌컥 마시더니 맛있다며 빨대에 자꾸 입을 들이댔다. 단 맛은 떨어졌지만 그늘에 앉아 시원하게 마시는 수박주스는 결코 못 잊을 맛이었다. 이따금 불어오는 미풍에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말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속을 수박주스로 가뿐하게 식혔다. 적도의 청명한 하늘과 바람과 말라카의 감성은 그야말로 헤븐. 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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