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아이가 등교하면 하교하는 오후 4~5시까지는 온통 자유시간이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자. 유. 부. 인.
남친, 여친 코스프레를 하며 남편 손을 꼭 잡고 숙소 근처 산책이라도 해볼까 했지만 놀랍게도 시내 곳곳에는 인도가 끊긴 곳이 많았다. 팜유 생산국이어서인지 기름값이 싼 편이었고-팜유로 바이오 디젤을 생산한다고 한다- 너나 나나 차 한 대씩 굴리는 게 다반사였다. 하다 못해 스쿠터라도 타고 다니는 곳이니 그들에게 이동 수단은 두 발이 아니라 바퀴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에서도 도보 구간을 늘리고 투자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역으로 걸을 도보가 없으니 사람들이 걷지를 않고 또 걷는 사람이 없으니 도보를 만들지 않는 이상한 악순환이 거듭된다. 횡단보도도 잘 없어서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를 건너야 할 때는 입술을 꽉 물고 눈치껏 무단횡단을 해야 했다.
우리가 시간을 보낼 곳은 쇼핑몰뿐이었다. 스타필드 쇼핑몰을 기준으로 그보다 약간 작거나 그 규모를 비웃을 만한 몇 배는 큰 대형 쇼핑몰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았다. 대체 이 많은 쇼핑몰들이 장사는 잘 되는 걸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쇼핑몰마다 입점한 업체와 편의시설이 약간 달랐는데 엄마들이 선호하던 곳은 숙소에서 차로 15분 거리의 원우타마였다. 13만 평이 넘는 아시아 최대 쇼핑몰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라 없는 게 없었다. 한국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는 키자니아와 서핑, 스카이다이빙 체험 등 아이들이 해 볼만한 흥미로운 시설들이 많았다.
엄마들과 부지런히 정보를 교환하며 원우타마에 갔던 날. 귀국할 때 지인들에게 나눠 줄 피퍼 쪼리 슬리퍼와 버릴스 초콜릿 등을 한 아름 샀다. 또 뭘 사가야 하나 살피던 중 쇼핑몰 맵엔 둔 누을 번쩍 뜨이게 하는 "한국 그로서리"가 있었다. 한식 재료를 사려면 한인타운이 있는 몽키아라까지 가야 하는데 너무 잘 됐다 싶었다. 그 넓은 쇼핑몰을 바삐 걸으며 찾아 헤매기를 수십여분. 이쯤에서 포기할까 주저하며 맵 앞에서 남편과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가녀린 소녀의 음성이 들렸다.
“혹시 한국 마트 가시려는 거예요?”
휙 돌아보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아가씨 두 명이 서 있었다. 맞다고 얼른 대답하니 마트까지 안내해 주겠다며 호의를 보였다. 외양은 말레이시아 사람인데 발음은 영락없는 한국인이었다. 실례일 줄도 모르고 말레이시아 분인지 한국 분인지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말레이시아 사람이란다. 어쩜 외국어를 이리 잘한단 말이냐. 외국어를 못하는 사람은 나뿐인 걸까.
“어쩜 그렇게 한국말을 잘하세요. 얼마나 배우셨어요?”
“8년 배웠어요. 중학교 때부터요.”
영어나라 사람이 타국에서 영어로 대화하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었다. 그녀들의 친절도 감사했지만 한국말을 오랫동안 배웠다니 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어 선생님이라도 되는 냥 이것저것 질문하며 대화를 나눴다.
5분 정도 걸었을까, 그녀들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마트가 코앞이었다. 나는 거듭 감사하다며 인사하고 돌아섰다. 세네 발자국 정도 걸었을 때였나 보다. 갑자기 저 뒤에서 “안녕히 계세요.”라며 그녀들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나도 덩달아 보통례로 답례했다. 아마 한국어 회화에서 배운 끝인사가 생각났나 보다. 귀엽고 고마운 아가씨들이었다.
원우타마의 한국 그로서리는 몽키아라 한인 마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김과 소주, 봉지라면 정도. 그나마 밀키트로 떡볶이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낯선 외국인에게 보여준 그들의 호의에 실망보다는 감동이 더 컸다.
쇼핑몰 천국엔 천사도 있다. 말레이시아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그 천사들과 조우하기를. 나 또한 한국에서 만나게 될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야지.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찾아와 줘서 고마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