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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사로운 Nov 05. 2024

나 다시 돌아갈래

경력단절주부의 유치원임용시험 도전기, 그 시작

구립도서관의 어린이열람실 한편,

소파와 바닥에 자유롭게 자리 잡은 십여 명의 아이들.

그 아이들 앞에 책 읽어주는 자원봉사자 선생님으로 의자에 앉았다.

오랜만에 많은 아이들 앞에서 읽으려니 심장이 콩닥콩닥.

우리 아이에게 매일 밤 읽어주던 “아씨방 일곱 동무”, 

내 아이에게 읽어준다 생각하자 되뇌며 떨리는 마음을 추스른다.

왼손과 팔뚝으로 그림책을 흔들림 없이 받쳐 들고 책과 아이들의 시선을 번갈아보며 자연스럽게 오른손으로 다음 장을 넘긴다.  분명 자연스럽게인데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기분 탓이겠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며 나의 연기 속으로 빠져든다. 새초롬한 홍실 각시가 되었다가, 뾰로통한 인두 낭자가 되었다가, 시끄러운 소리에 버럭 하는 화난 아씨까지. 누워있던 아이는 슬금슬금 일어나고 열람실의 다른 책을 둘러보던 아이도 내 앞으로 가만히 다가온다. 그림책의 그림을 따라, 내 목소리를 따라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눈빛이 하나씩 보인다. 서서히 긴장이 풀리고 걱정 반 설렘 반이었던 첫 번째 책 읽어주기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날 저녁, 남편에게 자원봉사 첫날 이야기를 들려주며 말했다. 


책을 읽어주면서 아이들이랑 눈맞춤하는데 그 순간이 너무 좋은 거 있지.
 다시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 교실에서.




내 입에서 다시 유치원 현장으로 가고 싶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나도, 그도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첫아이 출산을 앞두고 드디어 탈출을 외치며 홀가분히 유치원을 떠났던 나였기에.

어쩐 일인지 교실로 가고 싶다는 말을 내뱉은 이후 그 마음은 부풀어 오르는 빵 반죽처럼 커져만 갔다.


초임시절을 회상해 보자면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수업 자체도 어렵고, 모태 곰손답게 환경구성도 중구난방이고, 통제되지 않는 아이들과 원감선생님을 통해 들려오는 학부모들의 불만들. 그리고 무서운 사수선생님과의 불편한 관계까지. 이건 분명 잘 못 든 길이라며 퉁퉁 부은 눈으로 출근하는 날이 점차 많아졌다.

그냥 그만둬. 말아. 아프다고 할까. 아침이 밝아오는 게 무서웠던 시간들.

사회초년생이 겪는 과정이 다 그렇지 뭐. 일단 버텨. 아니야 버티다가 부러지겠어.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오가는 갈대 같은 마음속 모른 척할 수 없는 그놈의 책임감.

담임을 맡았으니 1년 마무리는 해야지. 어쩌면 1년을 버티면 내년에는 괜찮을 수도 있잖아.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보기로 했다.

허나 그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유치원의 가장 큰 행사이자, 교사로서의 능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고 여겼던 유치원 발표회. 절반의 성공과 함께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수고했다는 격려의 말을 들으며 한숨 돌리던 그때.

우리 반 아이가  발표회에 대한 불만으로 다음 해 재원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뼈 때리는(유독 나에게만 박한듯하여 원망스럽기도 한) 원감선생님의 평가서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총 맞은 것처럼 아프다.

아,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

그래, 이제 그만하자. 이쯤에서 접는 게 최선이야.

마음은 정리됐지만 고민은 시작이다. 나에게 맞는 길은 어디일까.

때마침, 예기치 않았던 소식이 들린다.  바로 동기들의 공립유치원교사 임용 시험 합격소식이다. 한 때는 나도 꿈꾸었던 그 길. 하지만 한 푼이라도 얼른 벌어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겠기에 선택할 수 없었던 그 길.

사립이라서 내가 잘 적응을 못하고 힘들었던 거지 공립이라면 달랐을 거야 하는 핑계 아닌 핑계와  친구들도 1년 만에 턱턱 합격하는데 나라고 못할까 하는 근자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까이 거, 해보자. 캄캄한 골목길에 가로등 하나가 반짝 켜지는 순간이었다.


인생 그거 참 쉽지 않다.

1년이면 충분하지 했던 도전은 그다음 해로 이어지면서 근자감도, 돈도, 의욕도 먼지처럼 사라졌다.  임용 실패라는 인생의 쓴맛을 머금고 텅 빈 통장을 채우기 위한 나의 목적지는 하나뿐. 어서 와, 사립이 처음은 아니지?

다행스럽게도 초임시절보다는 수업도, 아이들과의 교감도, 학부모나 동료와의 관계도 나아졌다. 하지만 실패로 다시 돌아왔다는 패배감 때문일까. 하루하루 고단했고, 지겨웠고, 답답했다. 이즈음 전 남친, 현 남편과의 데이트는 유일한 숨구멍이 되어주었다. 백마 탄 왕자님은 아니었지만 아득한 물 속에서 물 밖으로 숨을 틔어 준 산소 같은 이 남자를 따라 결혼과 임신이라는 새 길로 들어서며 사립을 탈출했다.


시간이 약이라 그런 걸까. 육아하고 살림하는 일상이 단조로워 그랬을까. 힘들었던 과거의 경험은 희미해지고 도서관에서 만난 아이들의 눈빛은 선명해졌다. 한껏 부풀어 오른 설렘이 쉬이 사그라들지 않음과 동시에 역시 돌아갈 곳은 거기뿐인가 하는 걱정이 피어올랐다.

그때 산소 같은 내 남자가 한번 더 숨을 틔어준다.


임용시험 다시 보면 어때?


숨을 크게 들이켜며 다O 플랫폼의 유치원 OO고시 대표카페에 가입했다. 이렇게 한번 더 임용 시험을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은 질긴 인연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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