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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담 Nov 08. 2024

4화. 흔들리는 신념





  진료실의 문이 열리며 중년의 여성 보호자가 성난 얼굴로 들어섰다. 영남은 그녀의 표정에서 그날 진료가 쉽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보호자는 옆에 앉아 있는 환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날카롭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 아버지가 살이 너무 빠졌어요. 이게 무슨 진료입니까?"



  영남은 차트를 확인하며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환자는 과거에 과도했던 체중이 최근 몇 개월 동안 정상 범위로 돌아와 있었다. 식단과 운동, 적절한 약물 치료로 건강이 호전된 사례였다. 그는 그동안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믿고 있었다.

  "아버님께서는 현재 정상 체중에 가까워지셨고, 전반적인 건강 상태도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과거에는 체중 때문에 혈압과 혈당 수치가 높았지만, 지금은 그 수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어요."



  영남은 차분히 설명했지만, 보호자의 표정은 더욱 굳어져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지며 불안감이 역력했다. 보호자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영남은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정상이라고요? 그런데 왜 이렇게 수척해 보이시죠? 어디가 더 안 좋아진 거 아닌가요?"



  그녀의 눈빛에는 단순한 의심 이상이 담겨 있었다. 그 눈빛은 '이 사람이 정말 내 아버지의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라는 깊은 의문과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영남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다시 차분히 답했다.

  "체중이 줄면서 얼굴이 조금 달라 보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수치가 건강한 범위에 있고,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안정적입니다. 체중 조절은 고혈압과 당뇨 관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영남의 을 막으려는 듯, 보호자가 그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

  "전 의학적인 설명이 아니라, 선생님이 정말 우리 아버지를 잘 돌보고 계신지 묻는 겁니다. 환자가 정말 좋아지고 있는 건가요? 아니면 그저 시간만 보내는 건가요?"

  보호자의 떨리는 목소리 속에서 영남은 그녀가 단순히 화가 난 보호자가 아님을 직감했다. 그 떨림 속엔 두려움과 의심이 얽혀 있었다. 영남은 진심을 다해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녀의 눈빛 속에 자신을 향한 차가운 불신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서늘한 눈빛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늘 기도합니다. 선생님께 지혜가 있기를요."

  영남의 마음속에 서늘한 파문이 일었다. 평소 위안이 되었던 '기도'라는 단어가 지금은 조롱처럼 들렸다. 이 순간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게 내가 바랐던 의사의 모습인가? 내가 정말 그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맞는가?' 진심으로 다가가려는 노력이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며 가벼워지고 있었다.



  보호자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진료실을 나섰고, 문이 닫히며 진료실에는 차가운 정적이 감돌았다. 영남은 모니터 속 차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차트 속 환자들의 이름과 수치는 그저 일련의 숫자처럼 보였다. 보호자의 날카로운 말이 그의 모든 노력을 단숨에 부정하는 것처럼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좋은 의사로 남고 싶다'는 그의 다짐은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점점 퇴색해 가는 것 같았다.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진심으로 다가간다 해도,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 진심은 어디로 가는 걸까? 내가 이들에게 필요한 사람인가? 그들이 원하는 사람인가?' 신념이 흔들리는 가운데 그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에 가슴이 아려왔다.








  다음 환자를 보기 위해 진료실 문이 다시 열렸다. 젊은 남성이 어색한 얼굴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영남은 차트를 보며 그에게 인사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보호자와의 대화가 떠오르고 있었다. 차트 속 검사 수치를 바라보며 설명을 하려는데, 순간 그 수치들이 어지러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이 예전처럼 담담하고 확신에 찬 설명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혈압과 당 수치는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다만…"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다만, 그게 정말 안정적이라는 말이 맞을까? 아니, 그는 진심을 다해 진료해 왔지만, 보호자의 불신이 그의 목소리를 무겁게 가로막는 것 같았다. 그는 환자를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연 나는 이 환자에게 필요한 사람일까? 그가 내 설명을 진심으로 받아들일까?'



  젊은 환자는 영남을 잠시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그의 물음에 영남은 잠시 움찔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 속에는 약간의 불안감이 스며 있었다. 설명을 이어가면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의문이 맴돌았다. '내가 진심으로 다가가려 해도, 그들이 내 진심을 믿어주지 않으면 내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그의 목소리엔 자신도 모르게 떨림이 묻어 있었다.


  

  





  진료가 끝난 후, 영남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창가에 다가섰다. 창밖에는 짙은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고 있었고, 그 구름은 마치 그의 신념을 가로막는 장벽처럼 느껴졌다. 환자들을 위해 쏟아온 그의 진심과 헌신이 현실 속에서 천천히 무너지고, 그가 이루고자 했던 이상마저 흐려지는 듯했다.



  영남은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끼며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했다.


  "내게 필요한 지혜를 주소서. 내가 진정으로 환자들을 위하고,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의사가 되기를…"


  기도가 끝났을 때, 영남은 자신이 원했던 평안이 여전히 멀리 있음을 느꼈다. 그의 기도는 허공 속으로 흩어지는 작은 메아리처럼 점차 사라져 갔고, 위안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가슴을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내가 찾고자 했던 답도, 붙잡고 있던 신념도.'



  서늘한 기운이 가슴 한가운데에 닿으며, 그는 자신이 붙들고 있던 신념이 눈앞에서 천천히 조각나고 있음을 느꼈다. 한때 그의 삶을 지탱해 주던 믿음이 이제는 더 이상 그를 붙들지 못하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허무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그가 기도로부터 기대했던 안식과 확신은 끝내 그에게 닿지 못한 채 멀어져 갔고, 남은 것은 차갑고 깊은 공허뿐이었다.








  진료실의 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가 아직도 영남의 귀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보호자가 남기고 간 차가운 불신의 시선이 텅 빈 진료실의 공기 속에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그 시선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며 여운을 남겼고, 그가 설명하려 했던 모든 진심은 그 순간 무의미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차트 속 숫자와 수치들이 그의 눈앞에서 일련의 무의미한 기호처럼 흔들렸다. '내가 진심을 다해 설명해도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의 진심은 어디로 가는 걸까? 내가 진정 그들에게 필요한 사람일까?' 영남은 진료실에 남아있는 정적 속에서 그 질문이 다시금 그의 마음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날 하루가 끝나고, 영남은 창가에 서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꾸만 떠오르는 질문을 피해보려 했지만, 그 질문은 그를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진심으로 다가가려 해도,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는 어떤 의미로 남게 되는 걸까?' 그의 질문은 공기 중에 떠돌며 그의 내면을 깊게 파고들었고, 그의 존재마저 희미하게 만드는 듯했다.


 

  영남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구름이 여전히 하늘을 가득 덮고 있었고, 빛 한 줄기조차 새어 나올 틈이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도 그와 같은 차가운 장막이 내려앉아 그의 신념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의 기도는 이제 더 이상 그를 지탱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 기도가 남긴 공허와 의문은 그의 존재마저 희미하게 만드는 듯했다.



  그가 던진 마지막 질문이 그의 내면을 뒤흔들며 긴 여운을 남겼다. 그 여운은 마치 공기 속에 떠다니며 그의 존재를 서서히 갉아먹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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