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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담 Nov 12. 2024

5화. 간호사와의 대화




  진료가 끝나고 영남은 진료실에서 홀로 남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하루 동안 보호자들이 던진 차가운 말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보호자가 남긴 "이게 다 돈 때문 아닌가요?"라는 말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고, 진심으로 다가가고자 했던 노력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좋은 의사가 되고 싶었는데….'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세례를 받을 때 가졌던 다짐은 단순한 목표가 아니라, 그의 자존심이자 살아가는 이유였다. 환자들에게 위안을 주고,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의사가 되고자 했던 것. 그는 그런 의사가 되기 위해 매일 새벽을 깨우며 노력해 왔다. 그러나 병원 안에서 그의 다짐은 점점 현실의 무게에 눌려 바래져 가고 있었다. 



  문득 조심스러운 문 노크 소리가 들렸다. 병동 간호사인 미정이었다. 그녀는 영남의 지친 얼굴을 보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심전도 결과 보고드리려고 왔는데…. 요즘 정말 지쳐 보이세요. 괜찮으세요?"



  영남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그동안 쌓여온 피로와 고민이 그의 입을 막고 있었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여 천천히 대답했다. 

  "괜찮지가 않네요…. 진심을 다해도, 이 병원 안에서는 그게 점점 무의미해지는 것 같아요. 내가 환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게 과연 있는지… 요즘엔 정말 모르겠어요."



  미정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도… 요즘 비슷한 마음이에요, 선생님. 얼마 전 보호자와 심하게 다툰 적이 있었어요. 정말 환자를 위해 설명을 드린 건데, 결국엔 제 말을 믿지 않더라고요. 그 이후로 저도 고민하게 돼요. 진심으로 다가가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냥 효율만 생각하는 게 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괴감과 피로가 묻어 있었다. 



  미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계속 말했다.

  "선생님이 환자 한 분 한 분에게 다가가려는 진심을, 저도 항상 느끼고 있어요. 그런 선생님을 보며 저도 초심을 지키려고 애쓰지만… 요즘은 저도 병원의 시스템에 제 마음이 무뎌져 가는 것 같아요." 그녀는 영남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작은 위로를 찾으려는 듯 눈을 떼지 않았다. 



  영남은 미정의 고백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에 작은 위안을 주었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과거의 한 순간이 떠올랐다. 의사로서의 첫 해, 조용히 그의 손을 잡으며 "정말 고맙다"며 눈물을 보였던 할머니 환자. 그날의 따뜻함은 그가 의사로서 처음 느낀 감동이자, 진정한 의사의 길을 걷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순간들을 위해 이 일을 시작했어요. 환자와 보호자에게 조금이라도 평온을 주고 싶었고, 그게 나의 길이라 믿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게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서, 내가 점점 기계처럼 변해가는 게 아닌가 싶어 무섭네요."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눈빛에는 공허한 회의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미정은 그가 고백하는 모습에 깊은 공감을 느끼며 작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래도… 선생님이 계셔서 저도 버틸 수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처럼 진심으로 다가가려 애쓰는 분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저에겐 큰 힘이에요. 선생님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진심은 결국 환자들에게 닿을 거라고 믿어요." 그녀의 말은 작은 파문처럼 영남의 마음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영남은 미정의 진심 어린 말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위로는 그가 잃어버린 듯했던 초심을 다시 되돌아보게 했다. 아무리 현실이 무거워도, 그 안에서 자신의 진심을 다하겠다는 결심이 다시금 그의 마음을 채웠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다짐했다. 

  "나의 진심이 작은 울림이라도 환자들에게 닿기를…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이 위로받길 바라며, 오늘도 이 자리를 지키겠어요."



  




  다음 날 아침 영남은 평소보다 더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진료실 창문을 열어 신선한 아침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창밖의 햇살이 병원의 회색 벽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결연하게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어쩌면 내가 기대한 변화는 작을지 모르지만, 그 작은 순간들이 언젠가는 환자들에게 진심으로 닿을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오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진료실 문을 열고 첫 환자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그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병원의 시스템이 그를 제한하고, 환자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현실일지라도, 그는 그 작은 순간들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언젠가 그의 작은 울림이 환자에게 닿아 그들에게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오늘도 다시 초심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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