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가 한창이던 오후, 문이 살짝 열리며 원무부장이 들어왔다. 영남은 그의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눈빛을 마주하며 곧 무언가 익숙한 이야기가 이어질 것임을 직감했다. 원무부장은 영남의 시선을 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사장님께서, 진료 시간을 줄여서 가능한 외래 환자 수를 늘려달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영남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겁게 숨을 내쉬었다. 익숙한 말이었다. 그러나 들을 때마다 그 말은 마음속 어딘가에 작고 날카로운 틈을 새로 내는 듯했다. "또 그 얘기군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책상 위에 시선을 고정했다. 의사로서의 다짐과 환자들에게 주고자 했던 진심이 서서히 병원의 요구 속에서 녹아가는 듯한 허무감이 스쳤다.
진료실을 나서며 그는 병원의 차갑게 빛나는 흰 벽과 규칙적으로 놓인 의자들, 무채색의 소독약 냄새 속을 지나갔다. 생명을 돌보는 공간이었으나, 이제는 온기가 사라진 기계처럼 느껴졌다. 복도를 따라 걸으며 그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형광등 불빛 아래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그 눈빛은 피로에 젖어 있었다. 이곳이 언젠가부터 위로가 아닌 무거운 짐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 전 만났던 환자와 보호자의 대화가 다시 머릿속을 스쳤다.
"이 병원이 다 돈 때문 아닌가요?"
오랫동안 치료가 필요한 환자의 보호자가 쏘아붙이듯 내뱉은 그 말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그가 의사로서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냉혹한 질문처럼 들렸다. 마음속에 깊이 박힌 그 목소리는 그의 존재를 흔들어놓았다.
책상에 앉자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를 따라 병원을 다녔던 날들, 아버지가 환자들에게 건네던 다정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 그때 그는 아버지처럼 환자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며 살아가리라 다짐했었다. "나도 저런 의사가 되겠어"라고. 그러나 현실은 그때 꿈꿨던 따스함과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짙은 회색 구름이 가득한 하늘이 그의 마음처럼 무겁고 흐릿했다.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신념이 점차 낯설어지고, 병원의 차가운 구조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는 기분이었다.
얼마 전 만났던 박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병원에 오래 머문 할머니가 그의 손을 꼭 잡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선생님 덕에 제가 여기까지 버텼어요." 그 말은 그의 마음속 작은 위로의 불씨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기억도 이제는 점점 흐릿해져 가는 먼 추억처럼 느껴졌다.
컴퓨터 화면에 펼쳐진 차트 기록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이름과 증상들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그저 일련의 숫자들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진심으로 환자들을 대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병원의 요구 앞에서 그의 진심은 서서히 무뎌지는 듯했다.
잠시 눈을 감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세례 받던 그날, 환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는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어린 자신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다짐은 이제 병원의 요구 속에서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때 창밖에서 희미하게 빛이 스쳐 그의 손을 감쌌다. 영남은 그 빛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 빛이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어둠 속에서도 빛은 여전히 존재하는 법이라는 듯.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진심을 잃지 않고 환자들에게 다가가려면, 자신이 다른 길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결심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환자들에게 진심을 다하지 못하는 의사로 남기보다는, 나를 지킬 수 있는 길을 찾아야겠어."
조용히 속삭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회색 구름 너머 여전히 존재할 빛을 믿으며, 그 빛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