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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담 Nov 02. 2024

2화. 병원에서의 현실



 

  영남은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잠시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성당의 고요한 공기 속에 촛불의 은은한 불빛이 맥박처럼 뛰고 있었고, 부드럽게 울려 퍼지는 찬송가는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며 안식을 주었다. 고요한 성당의 빛과 소리, 그리고 그 속의 평화는 마치 그가 오랫동안 찾던 쉼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가 다짐한 의사로서의 길이 그 평화 속에서 잠시나마 확고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병원에 들어서며 영남은 성당의 여운이 차갑게 식어감을 느꼈다. 새벽의 복도는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무심하게 깨어 있었고, 그 빛은 성당의 따스함과 달리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그 길을 걸을 때마다 발밑의 타일이 날카롭게 메마른 소리를 냈고, 병원의 복도는 차가운 설원 위를 걷는 듯 그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의 타일이 발밑에서 희미한 소리를 냈다. 그는 이 길을 수도 없이 걸어왔지만, 요즘 들어 이 복도가 마치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것처럼 낯설고 무겁게 느껴졌다.



  병원 입구에서 느껴진 낯선 분위기는 그의 하루를 예고하는 듯했다. 첫 진료는 두 번째로 방문하는 환자였다. 휠체어에 앉은 환자의 보호자는 문이 열리자마자 그를 바라보며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영남은 그들의 감정을 눈치채고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아버님, 그동안 어떠셨어요?"

 


  보호자는 차가운 눈빛으로 영남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처음엔 저희 아버지 상태가 좋아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 병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상태가 전혀 나아지질 않아요."



  영남은 숨을 한 번 고르고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환자분의 상태는 천천히 호전 중이십니다. 몇 가지 단계의 치료를 거치기에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지켜봐 주시면…"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보호자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보호자는 차가운 눈빛으로 영남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처음엔 당신이 아버지를 살려줄 줄 알았어요. 이제 와서 보니, 그저 돈벌이만 생각하는 병원이었네요. 환자가 진짜로 나아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우리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대체 제대로 하고 있는 건 맞나요?"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어 말했다.

  "솔직히, 비싼 진료비를 내면서도 매번 실망스럽기만 해요. 우리 아버지는 점점 나빠지고 있는데, 당신들은 그저 숫자와 서류 뒤에 숨는 것 같아요. 환자를 위한 병원이 아니라, 그냥 돈을 위한 병원 아닌가요?"



  영남은 순간 말문이 막히며 답을 잃었다. 의료 현장에서 언제나 환자 치료를 우선시하려고 노력했지만, 병원의 운영 방식이 종종 효율과 이익을 먼저 고려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보호자의 날카로운 말은 그의 가슴을 찌르듯 내리치며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최대한 침착하게 설명을 마무리하고 보호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엔 묵직한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진료가 끝난 후, 그는 한참 동안 진료실 안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리 위 형광등이 희미하게 깜박이고, 발밑의 타일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외래 간호사가 노크하고 들어와 이사장의 호출을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는 마음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늘 효율적인 진료와 빠른 회전을 요구하는 이사장과의 대화는 언제나 그에게 부담이었다. 



  이사장실에 들어선 영남은, 이사장이 반갑게 웃으며 악수를 건네는 순간 잠시 안도했다. 그러나 이사장의 표정에는 미묘한 피로와 고민이 엿보였다. 차 한 잔을 건네며 이사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남 선생님, 요즘 병원이 많이 힘듭니다. 잘 아시겠지만, 예산 압박이 심하고, 의료 장비 교체와 병상 확보 등 신경 쓸 일이 많아서요. 치료가 최우선이라는 건 저도 잘 알지만….” 이사장의 말은 마치 그의 속마음을 꿰뚫는 것 같았다. 영남은 가슴 깊숙이 차가운 비수가 스며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한참을 침묵하던 이사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환자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쏟으면 우리 병원은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의료 서비스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건 저도 동의하지만, 현실은 이상만으로 운영되지 않네요.”



  영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사장의 말은 현실적이었다. 의료진이 환자를 돌볼 때만큼이나, 병원 운영이 효율적이어야 병원이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이해했다. 그러나 여전히 찜찜한 마음은 남아 있었다. 진료실에서 만난 보호자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 병원이 환자보다 돈이 중요한 거 아닌가요?” 그의 진료가 더 이상 순수하지 못하다는 자책감과 함께, 이 병원에서 의사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왔다. 이사장은 그의 눈빛을 살피며, 말을 덧붙였다.



  “솔직히 말해, 저도 이 자리에 오기 전에는 선생님과 비슷한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병원을 운영하다 보니 모든 걸 환자 중심으로 할 수는 없더군요. 병원이 적자를 내면 결국 환자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도 줄어들 수밖에 없고… 때로는 효율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영남은 무거운 공기가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이 의사로서의 순수한 열망을 잃고, 병원의 거대한 시스템 속 한 톱니바퀴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사장의 입가에 스쳐 지나가는 쓸쓸한 미소는 영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사장은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저는 대학병원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했어요. 아이들을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하고 싶었지만, 예산이 부족해 치료를 포기해야 했던 경우도 많았죠. 그래서 이 병원을 운영할 때는 그런 한계를 넘고 싶었어요. 좋은 의사를 지켜주기 위해서는 병원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현실이 매일 저를 압박하네요.”



  영남은 이사장이 과거에 자신과 같은 꿈을 품었지만, 현실 속에서 점차 타협할 수밖에 없었음을 느꼈다. 그는 이사장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이어져 온 갈등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사장의 말은 여전히 그에게 회의감을 남겼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영남은 굳게 다문 입술을 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사장님, 저도 병원 운영의 어려움을 이해합니다. 다만, 환자 한 명 한 명을 성심껏 돌보는 것이 제 의사로서의 신념입니다. 그것만은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영남의 목소리가 망설임 없이 단단하게 울려 퍼지는 순간, 이사장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이 허공에 멈춘 채,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순간적이었지만 그 속에는 불편함과 알 수 없는 고뇌가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는 곧 평소의 온화한 미소를 되찾았지만, 그 찰나의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남아 묘한 긴장을 만들어냈다.



  이사장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찻잔을 천천히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영남 선생님, 저도 선생님의 철학을 존중해요. 하지만 기억해 주세요. 병원을 지켜야 비로소 환자도, 의사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싸우고 있는 건 단순히 돈이 아니라, 더 많은 환자들에게 안정적인 의료를 제공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환경입니다. 이해해 주실 거라 믿어요.”



  영남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는 이해한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신의 이상과 현실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며 혼란스러웠다. 이사장의 현실적인 입장은 병원의 구조적인 문제를 그가 다시금 인식하게 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무언가가 씁쓸하게 남아 있었다. 



  이사장의 말이 남긴 여운을 품은 채, 영남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병원 복도로 나왔다.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 그의 그림자는 복도 위에 길게 늘어져 흔들렸다. 그 빛은 어두운 설원 위에 얇게 내린 서리가 옅어지다 다시 쌓이는 것처럼, 희미하게 깜빡이며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서늘한 공기가 그의 피부에 스며들 때, 문득 젊은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사람의 생명과 아픔을 지키겠다는 신념 하나로 가슴을 불태웠었다. 고통 앞에서 작아진 자신을 느끼고, 그의 손길이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때는 오직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의 병원, 차가운 현실 속에서 그의 신념은 흔들리는 불빛처럼 언제라도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스스로에게 다시 물었다. 지금도 나는 그 신념을 지키고 있는가? 사람을 위한 길이라 믿었던 의사가 진료실에서 하루하루 지쳐가고, 환자의 눈빛은 날카롭게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복도 끝 작은 창으로 희미한 새벽빛이 스며들었지만, 그것조차 차가운 형광등 불빛에 묻혀 아련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영남은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홀로 걷고 있는 자신을 그려보았다. 과연 그 설원 끝 어딘가에 따뜻한 햇살이 비춰 줄까? 아니면, 그저 끝도 없는 얼음 벌판 속에서 홀로 남아 있는 것일까? 자신의 신념이 단단한 믿음인지, 아니면 차가운 눈밭 위에 쓰러진 얼어붙은 꿈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복도 한가운데에 멈춰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차가운 형광등 아래 펼쳐진 설원이 끝없이 이어졌고, 그 뒤편 창문 너머로 어렴풋이 밝아 오는 새벽이 있었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 있던 그는 희미하게 떠오르는 빛을 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마음 깊은 곳, 아직 남아 있는 온기를 찾고자 하는 미약한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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