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피어난 봄
일요일 아침, 좀 전까지
밖에서만 수줍게 서성거리던 햇살이
어느새 집 안으로 성큼 들어와
부채를 펼친 것처럼 꽉 들어찼다.
아직 아이들의 검은 눈동자가
또렷해지지 않는 시간.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운 다음,
긴 항로를 향해 출항 준비를 하는
비장한 선장처럼 다음 '여정'을 준비한다.
사실 '여정'이라고 해봤자
아이 4명을 외출 준비 시키는 것일 뿐이지만,
(차라리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근사한
'사명' 같은 것이었으면 좋으련만.)
생각만으로도 이미
고달픈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거대한 종소리와도 같아,
마음을 텅! 하고 울린다.
말 많은 9살 첫째는 쉬지 않고
재잘재잘하면서 따라다닌다.
마치 여름 장마처럼, 끊임없이 내리는
빗줄기 같은 단어들이 쏟아져 내린다.
결국 나의 입에서 색깔 없는 흰 종이같이
영혼 없는 대답만 나올 뿐이다.
3명의 동생들은 어느덧 사냥을 하러 다니는
야수같이 깨어나, 넘쳐흐르는 힘으로
발길이 닿는 곳곳마다 난장판을 만들었다.
3살 막내의 저 작은 발에
양말 하나 신기는 일조차 버겁다.
3월의 햇살을 받아 힘이 넘치는 물고기처럼,
양말을 신기려고 잡아도 파닥파닥
금방 빠져나가 깔깔대며 도망간다.
거실의 풍경이 천천히 눈에 들어온다.
온갖 색채의 향연이 가득하다.
파란색 베개, 빨간 장난감, 녹색 공,
노란색 색종이들, 벗어던진 흰 옷들,
해적놀이를 한다고 쌓아 올린 의자와 물건들..
형태와 색깔들로만 보면
미술관 중앙에 전시된 설치 예술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가 미술관이 아닌 것이 안타깝다.
저 구석에 구멍이 뚫린 인형처럼,
자꾸만 빠져나오는 솜뭉치처럼,
내 안에도 구멍이 뚫린 듯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듯하다.
저 멀리 북쪽에서 오는지
차가운 바람이 지나가다
요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집안을 기웃거린다.
바람아, 바람아.
갈 때 저 거실에 있는 모든 장난감도
다 같이 쓸어 담아서 가주렴.
혹시 시간이 되고 무게가 된다면
나도 갈 때 같이 데려가주면 안 될까.
뜨거운 태양 같은 불꽃으로
타오르는 나의 마음이
호랑이처럼 포효하고 싶었으나,
그럴 힘조차 없어진 나는
고양이처럼 가르랑하기만 한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아이들
모두 신발에 발을 넣었다.
곧이어 고요한 언덕처럼 잠잠했던 현관문이
마치 폭탄이 떨어진 듯 쾅하고 열린다.
평안했던 복도는 갑자기 봉변을 당한
공기들이 갈팡질팡 도망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이들의 커다란 목소리가 그 당황함들을
끝도 없이 추격하기 시작한다.
이 이름 모를 액션 영화의 감독은 아니지만,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스텝이라도 된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진다.
당황한 공기야, 미안하구나.
거대한 목소리들아, 제발 멈추어다오.
나도 고요한 세상 속에 살고 싶지만
인생이라는게 뜻대로 잘 안되는걸.
이토록 침묵이라는 긴 단어가
필요한 순간이 오면
위층, 아래층, 옆층 모든 이웃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영원한 침묵의 봉인 열쇠라도 되는 것처럼
손가락을 세워 입에 갖다 댄다. '쉿!!'
작은 발들이 땅을 밟는다.
오늘따라 햇살이 뜨겁게 느껴지는 게
마음도 타들어가는 것만 같다.
아.. 오늘도 지각이구나 ㅠ.ㅠ
이번 주부터는 절대 지각하지 않으리
그리도 다짐했건만.
아이들은 벌써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이제 그래도 첫째와 둘째가 좀 컸다고
동생들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같이 보조를 맞춰 걸어주기도 한다.
보통 때라면 뒤에서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며 걸었을 테지만
오늘은 햇살이 지나치게 밝아서인지,
또 지각했다는 자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3월이면 벌써 와야 할
봄이 천천히 더디게 와서 그런 건지,
어색한 미소만 나올 뿐이었다.
봄에게 날아다니는
저 독수리 날개 깃털이라도
한가득 붙여주고 싶다며,
툴툴거리며 힘 빠진 소처럼
터벅터벅 천천히 걸었다.
그때, 저만치 앞서가던
막내가 갑자기 뒤를 돌아본다.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난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왜?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곧
두 팔을 벌리고 멀리서부터 뛰어온다.
햇살처럼 밝은 함박웃음을 머금고
나를 계속 부르면서 달려온다.
그리고 내 품에 폭 안긴다.
아, 부드럽다.
따뜻하다.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다.
성시경의 '너는 나의 봄이다'
노래가 마음을 스쳐간다.
막내의 햇덩이 같은 웃음이
온 세상뿐 아니라 내 삶도 어루만진다.
따뜻한 봄처럼 달려오는
아이야, 너는 정말 나의 봄이구나.
아이들이 부럽다.
아무리 속 썩여도
이렇게 팔 한 번 벌리고 뛰어와서 안기면,
부모 마음 눈 녹이듯 풀어버리니까.
아, 그나저나 효도는
다섯 살 이전에 다한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얘는 이제 효도 다한 듯하다.
서로를 안고 있는 훈훈한 장면 옆으로
아까 집에 잠시 들렀던
그 바람이 다시 지나간다.
아침에는 분명 차디 찬 바람이었는데,
봄이 더디 온다고 툴툴거렸는데,
지금은 바람이 따스하다.
아직은 어리고 연약하지만
그래, 이건 분명 봄이야.
봄은 이미 내 품에 와있다.
저 멀리 흙담 옆에서
이름 모를 꽃 하나가 넌지시 피어나 있다.
햇살을 받아 예쁘게 빛난다.
내 마음속에 핀 꽃처럼.
*지난 일요일 시점으로 쓰인 글입니다*^^*
- 오늘 배운 수업 내용
1. 살아가면서 꼭 한 번씩 뒤를 돌아봐야겠다.
늦게 오는 사람은 없는지, 낙담한 사람은 없는지, 지친 사람은 없는지
뒤돌아보고 마음을 열어 먼저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2. 다른 사람 마음에도 봄이 올 수 있도록 더 다정하게, 더 친절하게 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