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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세라이아

by 안이서

엘라라는 강률을 외면했던 자신들의 입장을 다시 확인시켜 주려는 듯 말했다.

“사랑이 없는 영성 지도자라니……, 누가 널 믿고 따를까?”


[지구에 있을 때, 엉터리 종교인들에 대한 뉴스가 왕왕 들렸다.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권위, 경제적 이득을 위해 순진하다 못해 우매한 사람들을 협박하다시피하며 이용해 먹는 그들을 볼 때마다 스승님은 애끓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분노와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제자들에게 말했었다.

“물론 너희들은 저렇게 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저들을 잘 봐 둬. 사랑이 없이 영성 이야기를 하는 자들은 악마의 하수인이야. 그리고 저들이 세상에 퍼뜨리는 얘기는 가라지야. 신의 말씀처럼 포장한 악의 씨야. 잘 봐 둬. 저들이 뿌린 거짓 정보에서 인간을 구하는 것이 신성을 찾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인 거야. 명심해.”]


엘라라의 질문 끝에 과거 스승님이 강조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강률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기가 하마터면 악마 같은 짓을 할 뻔 했다!

엘라라의 말대로 자기가 인간을 싫어한다는 것을 그들 모두 느끼고 있었다. 자신만 그의 감정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들에게 숨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숨기고 있었다. 왜 그랬지? 영성 지도자의 마음에는 미움이 없어야 한다고, 사랑으로 가득해야 한다고 막연하게 여겼었나 보다. 아이러니 하게도 아무도 속아 넘어가지 않는데, 자기 자신만 속인 꼴이 됐다.

“노화가 재가동 됐다는 걸 알았을 때 우리는 모두 널 떠올렸어.”

자신의 내면에서 현실로 정신이 돌아온 강률은 이제야 엘라라의 말에 집중할 수 있었다.

“왜 인지는,”

하고 엘라라는 입술을 재미있게 비틀며 강률의 몸을 손으로 가리켰다.

“서로 접촉할 수 없는 에너지체라도 얻고 싶다는 부류가 있었고, 죽음 앞에서 영적인 위안을 받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었어. 완전한 자유라며 방종하게 살았던 최근 몇 년의 삶을 회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이유에서든 네가 필요했지. 그래서 열심히 널 찾아 다녔어.”

거기까지 말한 엘라라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강률의 몸을 이리저리 훑어봤다. 그리고 그의 팔을 잡아보았다. 진짜 몸을 만지는 것과 똑같았다.

“영원히 이 몸으로 살 수 있는 거야?”

“내가 영원히 살기를 원하기만 하면요.”

“넌……, 진짜로 신적인 존재가 된 것 같구나.”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라라도 강률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음 말을 이었다.

“우릴 도와줄래?”

강률은 그 말에도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엘라라의 말에 의하면 타락한 인간들이 회개를 한다고 하지만, 그 회개가 영혼 안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내세가 있을까봐, 그곳에서 죄에 대한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순진하고 무지한 발상이다. 만약 회개의 이유가 그런 거라면 강률의 실망감만 더 커질 뿐이다.

‘본성이 사악한 사람이 영생의 몸까지 얻게 되면 노바리스 에테리아는 어떻게 될까?’

그때 아갸가 조용히 다가와 강률의 옆에 살포시 앉았다. 인간들의 대화를 이해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저 멀찍이 혼자 있다가 심심해져서 온 것일 테지. 강률은 아갸를 바라보았다. 안타까움으로 일렁이는 눈동자 속에 인정머리 없는 강률의 모습이 비쳐졌다. 아갸의 콧등과 목덜미에서 평소보다 몇 배나 밝은 빛이 무지개색으로 발산됐다. 아갸는 자신의 동료들이 몰살됐을 때 느꼈던 슬픔, 고통, 외로움을 온 몸으로 표현했다.

[인간들이 모두 죽으면 너도 슬플 거야. 고통스럽고 외로울 거야. 너를 위해서라도 그들을 도와줘야만 해.]


“강률, 네가 외면하면 우린 정말 끝이야.”

엘라라의 목소리가 강률의 정신에 박혔다. 강률은 엘라라를 바라보았다.

“당신들의 수행을 도울게요. 다만!”

강률은 힘을 주어 자신의 뜻을 마저 전했다.

“회개는 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수행은 모든 이에게 허락되지 않을 겁니다. 수행에 적합한 사람들은 제가 선별할 겁니다.”



귀환


강률이 늙지 않는 완전한 몸을 완성했다는 소문은 불길처럼 번졌다. 그가 죽음 앞에 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온다는 이야기도 함께 퍼졌다.

에덴스아크의 상공에 그를 태운 정찰기가 포착됐다는 소식이 들리자, 사람들은 무언가 신적인 장면을 목격하려는 듯 중앙광장의 출입구 앞으로 몰려들었다.

레이지와 말리카는 광장 상부에 놓인 의자에 앉아 강률 일행을 기다렸다. 둘 다 겉으로는 차분함을 가장했지만 속으로는 긴장감이 아랫배를 꽉 쥐어짜고 있었다. 과거 레이지는 강률을 대 놓고 무시했었고, 말리카는……, “흠!” 헛기침을 했다. 강률이 그녀를 인간으로 봐 주기나 할지 걱정이 됐다.

사람들의 기억 속 강률은 투명한 에너지체였다. 발끝조차 땅에 닿지 않고 허공을 미끄러지듯 이동하거나, 한순간에 사라졌다가 다른 곳에 나타나는 존재. 호흡 수련으로 육체 안에 에너지를 응집해 만든다는 ‘에너지 몸’은 엄청난 수행의 결실이라 했지만, 그들에게는 귀신이나 환영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 성취를 가차 없이 비웃었다. 그러나 지금, 그 웃음은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거대한 문이 서서히 열렸다. 먼저 나타난 것은 엘라라였다. 그녀의 옆, 아니 그 뒤를 서서히 가르는 그림자가 있었다.

강률이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공기마저 무겁게 내려앉아 웅성거림도 깔아뭉갰다.

빛이 닿는 각도마다 그 피부는 은은하게 빛났고, 걸음은 느리지만 발걸음마다 주변의 공간이 그를 중심으로 파문처럼 흔들렸다. 눈빛은 깊고 차가웠으나, 그 속에 숨겨진 불꽃이 보는 이들의 숨을 멎게 했다.

강률의 육체는 완전히 물질화 돼 있었다. 스스로 창조한 육체!

누군가는 자기의 눈을 의심해 자꾸 깜빡 거렸고, 누군가는 숨이 멎을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놀랍기도 했지만 신의 영역에 침범한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손뼉을 쳤다. 그 가느다란 울림이 번져,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환영과 경외, 그리고 두려움이 어지럽게 섞인 에너지가 광장 안에 가득 찼다.

그때 세라이아의 시선이 강률에게서 천천히 옮겨갔다.

거기, 허섭한 옷을 걸친 암컷 유인원이 서 있었다. 그녀의 피부에서는 형광빛이 은은히 어렸고, 시선은 어린아이처럼 사방을 기웃거렸다.

바라보는 순간, 세라이아의 가슴 한가운데서 시큼한 통증이 솟구쳤다. 동시에 머릿속 송과체로 우주 정보가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세라이아의 육체를 앞뒤로 진동시킬 정도로 방대한 양이었다.

맑고 검은 눈동자 안에 순수와 호기심, 세라이아를 향한 애틋함이 흘러넘치던 소녀의 모습이 유인원에게 겹쳐 보였다.

숨이 막히고, 눈물이 시야를 가려 그 형체가 흐려졌다.

세라이아는 떨리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입술을 열지 않은 채 속으로, 그러나 너무나 선명하게 그 이름을 불렀다.

‘서루……, 나의 서루…….’

삼십여 년 세라이아를 괴롭히던 바닥이 없는 결핍감이 사라졌다. 이제야 자신이 완성되는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 세라이아의 어깨를 쳤다.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돌려보니 야미였다. 특유의 빈정대는 미소가 어린 입술이 기울어졌다.

“야, 저 원숭이년한테 반했냐? 첫사랑이라도 만난 것 마냥 애틋한 표정이다?”

세라이아는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말없이 야미를 밀치고 군중을 빠져 나갔다.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정보를 본인이 이해할 수 있게 정리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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