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회복

세라이아

by 안이서

군중을 빠져 나오며 세라이아는 서루를 다시 확인했다.

‘왜 인간이 아닌 유인원의 모습으로 환생한 걸까?’

강률이 군중 앞으로 나아가는 중에 서루는 카를로스의 뒤를 따라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세라이아는 거리를 두고 몰래 그들의 뒤를 따랐다. 서루는 정신없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놀라고 신기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다른 유인원들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특유의 호기심을 발동시키긴 하지만, 얼굴에는 두려움도 한 가득 담아놓기 마련인데, 서루에게 두려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기억을 잃었겠지만, 무의식 어딘가에 자신의 왕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나 보다.

카를로스는 서루를 데리고 승강기에 올랐다. 세라이아는 따라 탈까? 짧은 시간 궁리했지만 그들을 그냥 보냈다. 승강기는 11층에 멈췄다. 강률의 숙소가 있는 층이었다. 강률을 따라 온 유인원을 데려다 놓아야 할 곳은 당연히 강률의 숙소이겠지.

지금은 서루를 만나는 것보다 먼저 확인할 것이 있다. 바로 에너지체 배양이었다.

[들숨과 날숨을 같은 길이로 번갈아 단전에 들였다가 내보낸다. 들숨, 날숨이 최소한 각각 1분을 넘어야 단전에 모인 기운이 커져 에너지체가 만들어진다.]

세라이아는 자신의 방으로 갔다.


정좌를 하고 앉아 눈을 감고 들이마신 공기 속의 에너지가 단전으로 간다고 생각하며 가늘고 긴 숨을 들이켰다.

‘일, 이, 삼, 사…… 오십팔, 오십구, 육십.’

단전에 열감과 구체의 에너지가 단단하게 뭉치는 게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가는 숨을 내 뱉으며 숫자를 다시 셌다.

‘일, 이, 삼, 사…… 오십팔, 오십구, 육십.’

늘 해 온 수련인 것처럼 숨이 전혀 가쁘지 않았다. 더 길게 하라고 해도 가능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들숨 1분, 날숨 1분이 자신에게 가장 안정적인 것 같아 그 시간을 지속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감은 눈앞에 사각의 화면이 밝아졌다. 이 또한 익숙한 현상이었다. 전생에 수 십 번도 더 경험한 체험이다.

화면 안에서는 무수한 장면들이 지나가는데 모르는 장소, 모르는 사람들, 대부분 의미 없는 영상들이었다. 그래서 지금 세라이아는 눈앞에 펼쳐진 화면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그 화면에 아는 얼굴이 나왔다. 아니, 모르는 얼굴인데 아는 사람이었다.

세라이아가 회복한 기억에는 강률이 전생에 자신의 제자였고, 전전생에는 ‘달’이라는 이름을 가진 같은 신족이었다는 것이다. 서루는 달 때문에 죽었다. 그런 이야기는 기억이 있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랐다.

지금 화면에 나타난 모르는 여인의 얼굴이 ‘달’이라는 건 느낌으로 알게 됐다.

위도, 아래도, 앞뒤도 없는 무한계의 어둠 속에서 그녀는 처절하게 울고 있었다. 숨조차 닿지 않는 차갑고 무한한 공허에, 달의 울부짖음은 메아리처럼 끝없이 번졌다. 그 순간 서슬퍼런 불길이 사방에서 치솟아 그녀를 감쌌다. 불꽃은 단순한 화염이 아니었다. 빛과 소리, 번쩍임과 파열음이 한데 얽혀, 마치 그녀의 존재 자체를 찢어내는 듯한 소리를 냈다.

달은 두 손을 뻗어 어둠을 붙잡으려 했으나, 손끝에서 터져 나온 불꽃이 곧장 그녀의 살과 혼을 태워 삼켰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수많은 인간들의 얼굴이 일순간 스쳐 지나가며 비명처럼 흩어졌다. 어디 그녀의 손에 죽은 자가 서루뿐이겠는가!

우주의 신은 달의 ‘영’을 감싼 모든 ‘혼’을 불태우고 있었다. 한 겹, 또 한 겹, 기억과 경험이 불꽃 속에서 바스러지며 사라졌다. 그녀의 울음소리는 점점 파편화되어, 마침내는 불꽃의 타닥거림과 함께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동안, 세라이아의 마음은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맥박은 느려지고, 호흡은 흔들림 없이 고요히 이어졌다. 그 차가운 침묵 속에서 단죄는 끝을 향해 나아갔다.


‘혼’은 ‘영’이 육체를 입은 후 겪는 모든 경험들, 정보들이다. 자신에 대한 정보가 싸그리 사라진다는 것은 우주 신의 단죄이면서 은혜이기도 했다. 더 이상 선함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전혀 없는 영에게 혼을 지움으로 새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달은 에너지체 차원에서 추방됐다.

달의 혼을 지우는 단죄는 세라이아가 인간으로 환생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그제야 전생의 제자 강률이 에너지체까지 완성하고도 왜 과거 기억이 없는 건지 알게 됐다. 동시에,

세라이아는 육체에 겹쳐진 또 다른 몸도 느낄 수 있었다. 감았던 눈을 떴다. 오른팔을 들어보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다리 위에 육체의 팔을 그대로 드리워져 있다. 눈엔 보이지 않지만 세라이가가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다른 몸의 팔이 떠올랐다. 세라이아는 에너지를 더 응집해 보았다. 투명했던 에너지체가 반투명해졌다. 드디어 에너지체가 완성된 것이다. 이미 전생에 만들어놓았던 몸이라 몇 시간의 수행으로 에너지체를 회복했다. 세라이아는 다시 에너지를 풀어 투명하게 만든 후 육체와 분리했다. 그리고

‘서루……’

가 마음에 울린 순간 에너지체는 그녀가 있는 강률의 방으로 이동됐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25화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