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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갸

아갸

by 안이서

강률을 만나기 전, 아갸의 세계관에는 단 두 종류의 생명체만이 있었다. 털이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런데 강률은 그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낯선 외형은 보통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인데, 그에게서는 조금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황홀해져, 잠시 전까지 눈앞에 있던 유인원 무리의 몰살조차 잊을 정도였다.

강률은 어떤 때는 투명해져 아갸의 손이 그의 몸을 뚫고 지나가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단단해져 그의 손을 잡을 수도 있었다.

‘도대체 이 생명체는 무엇일까?’

강률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했다. 밤하늘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어어어기 어딘가의 별, 지구가 내 고향이야.”

그는 끊임없이 입을 열어 수많은 소리를 내뱉었다. 다른 생명체와 달리, 그 소리는 늘 새로워 아갸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그날 방문한 다른 인간들 역시 입을 벌리고 닫으며 길고 많은 소리를 주고받았다.

이곳의 생명체는 단순한 소리만으로 뜻을 전한다. 사실 소리가 없어도 직감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강률 역시 말하지 않아도 아갸의 마음을 읽었지만, 다른 인간들은 반드시 소리를 내야만 소통이 가능한 듯했다.

아갸는 벽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방을 둘러보았다. 초원의 오두막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달랐다. 잠자리와 책상, 의자가 있는 건 같았지만, 훨씬 환하고, 하얗고, 미끈거리고, 또 좁았다. 벽은 차갑게 젖어 있는 듯했고, 공기에는 금속 같은 냄새가 배어 있었다. 너무 달라서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온 듯했다.

카를로스는 책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강률은 아갸가 낯선 공간에서 엉뚱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잠시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아갸는 이들의 특성답게 호기심이 많았다. 여기저기를 만지며 놀라고 감탄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카를로스의 마음속에 문득 한 생각이 스쳤다.

‘이 행성에서 문명을 일궈야 하는 건 인간이 아니라 저 유인원들이 아닐까?’

아래층 중앙광장에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인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어딘가 무모해 보였다. 카를로스의 눈앞에 조금 전 보았던 초원과 농작물, 연기가 피어오르는 오두막의 풍경이 겹쳐졌다. 아늑하고 다정한 그 전경은 그 어떤 계획도 없이 자연과 더불어 늙어 죽는 삶이 오히려 신의 축복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영생……, 인간이 영원히 살며 세상의 모든 경험을 다 겪고 나면 결국 무엇이 남는 걸까?’

그때, 호들갑스러운 소리가 카를로스를 현실로 끌어냈다.

“아갸갸갸, 아갸!”

아갸는 두툼한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그 공간과 카를로스를 번갈아 보았다. 무언가 열심히 의사를 표현하려 했지만, 카를로스로서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갸, 아갸 거려도 내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냐?”

카를로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눈치 빠른 아갸는 자신이 보는 것을 말해봐야 소용없음을 깨닫고 손을 내렸다. 카를로스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강률을 찾아 헤매느라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이제는 조금이라도 쉬고 싶었다.


아갸는 그에게서 눈을 떼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순간 공기가 은은히 떨리듯 흔들리더니, 투명한 몸의 세라이아가 나타나 아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서루야, 보고 싶었어.”


인간 남자의 목소리가 아갸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이토록 아름다운 존재라니…….’

아갸의 손이 절로 세라이아에게 향했다. 가던 중 아갸의 마음 한 구석이 손을 막았다.

자신의 손이 세라이아의 얼굴 가까이 갔을 때, 그의 아름다운 눈, 코, 입, 얼굴선 위로 겹친 뭉툭하고 거친 털로 덥힌 자신의 손이 보였다.

[다름]

아갸는 뒤로 물러섰다. 손을 막은 한 구석의 감정이 마음 전체로 번지더니 그녀의 모든 세포에 퍼졌다. 분노, 슬픔, 비애, 아련함. 너무도 익숙해 그 감정 자체가 본인의 존재성인 것처럼 느껴졌다. 눈물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슬픔인지, 그리움인지, 혹은 차마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 앞에서의 두려움인지. 아갸는 구석으로 냉큼 도망가 웅크리고 앉아 팔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눈앞의 세상을 가리고 싶었다.


아갸가 유인원 무리 속에 있을 때는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뭔지도 몰랐다. [다름] 그녀가 무리에게 따돌림을 당한 이유는 그녀 스스로 혼자이기를 택했기 때문이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 건지 모르지만, 자신은 그들에게 속해 있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혼자 있는 것이 괴롭지 않았다.

처음 괴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낀 건 무리가 몰살된 현장을 보았을 때였다. 무섭고 슬펐다. 그들을 죽게 한 상처들을 보며 같은 아픔을 느꼈었다. 그들이 살아 있을 때 좀 더 가깝게 지낼 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하지만 강률과 함께 지낸 후 고통은 많이 사라졌다.

유인원 무리 속에서 지낼 때보다 강률과 함께 있을 때 도리어 마음이 편했다. 아니, ‘비로소’ 마음이 편했다. 강률이 속한 세계가 자신의 몸에 딱 맞는 옷처럼 느껴졌다. [다름]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저 남자.

‘저 남자 앞에서 나는 왜 이리도 초라하게 느껴지는 거지?’

초라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와 자신의 다름이 확연히 느껴졌고, 그 때문에 수치스러웠다.

‘난 왜 저 사람과 다른 모습이지?’

고개를 들어 그를 다시 보고 싶은데, 미치도록 보고 싶은데 반대로 그에게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싶기도 했다. 더 혼란스러운 건 언젠가 지금과 똑같은 아픔 속에 지냈던 것 같다는 기시감이었다.


“서루야, 그런 거 아니야. 아파하지 마. 지금 네가 왜 아파하는 지 난 알아. 내가 얘기해 줄게.”

아갸의 머릿속에 세라이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보았다. 투명한 세라이아는 카를로스를 살폈다. 잔잔한 코골이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나 보다. 세라이아는 집게손가락으로 입술을 누르며 아갸에게 조용히 해야 한다는 표현을 했다. 그리고 숙소 문을 열어 나오라고 손짓을 보였다. 그녀에게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려면 둘만 있을 조용한 곳으로 가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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