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반장 선거 이야기
엄마! 엄마! 나 반장 됐어!
정말?!!! 너무 잘 됐다. 빨리 아빠한테 전화드려! 할머니한테도!!
"아빠 저 반장 됐어요!!!"
싱글벙글 웃는 아이 얼굴.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 기분도 덩달아 좋다.
근데 갑자기 침대 위에 있는 나. 이게 뭐야. 7시 알람?
꿈이었다. 무슨 이런 꿈을 꿔..라고 하기에는 어제 자기 직전까지 아이의 반장 선거문을 들었던 나에게는 당연한 꿈이었다. 상쾌한 기분이 들어야 하는 이 시각. 아, 뭔가 받았다가 뺏긴 기분이 들었다.
반장선거는 바로 오늘이다. 정확히는 몇 시간 뒤. 아이는 일어나자마자 또 선거문을 읽는다. 아이에게 꿈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왜냐면 아이가 무서운 꿈을 꾸고 그것이 현실이 되면 어떡하지?라고 걱정 할 때마다 "다 꿈은 반대다."라며 단호박처럼 말했던 엄마였기 때문에. 꿈은 반대라지만. 이번 꿈은 제발 이루어져라.
아이와 얼굴을 마주치는 순간마다 이렇게 파이팅을 많이 외친 아침이 있었을까. 등교하는 길. 혹시나 반장선거에서 떨어질까 봐 미리 방어막도 쳤다.
"당선이 안 돼도 괜찮아. 선거에 나간 자체가 엄청 큰 용기이고 대단한 도전이야. 당선이 안 돼도 용기상으로 엄마가 오늘 저녁 무조건 치킨 쏜다."
치킨 방어막을 들은 아이는 긴장이 풀렸는지 웃으며 등교했다.
2교시에 반장선거를 한다고 했는데. 지금쯤 발표하고 있겠지? 오늘따라 시계에 자꾸 눈이 간다.
그리고 괜히 회사에 있는 신랑에게 카톡 했다.
자기야, 지금쯤 발표하고 있을 텐데 잘하고 있을까?
묵묵부답. 그래. 또 나 혼자 걱정할 일이지.
아이에게는 그냥 해봐!라고 했는데 왜 내가 더 긴장하고 있는 걸까.
그토록 도전적인 아이가 되길 원했으면서 막상 아이가 도전을 시작하니 아이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 가득한 모습이나 하고 있다니.
처음 아이가 반장선거를 나간다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도 밖으로도 많이 놀랬다.
우리 아이는 자기가 꼭 말을 해야 되는 상황에도 2살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가는 아이였다. 데리고만 가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해야 될 이야기도 동생한테 시키는 아이다. 그러다 보니 2살 어린 여동생은 사내대장부 같은 성격을 가지게 됐고 첫째 아이는 덩치와 어울리진 않지만 수줍음이 많은 소녀소녀한 캐릭터가 됐다.
나는 이 소녀소녀한 캐릭터가 사실 맘에 들지 않았다. 자기 자식의 성향이니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지만 나와 다른 성격 탓에 자꾸 바꾸려고만 했고 매번 도전하지 않은 아이를 보며 걱정도 참 많이 했다. 차라리 실력이 없으면 남들 앞에 안 나가도 상관없지만 가지고 있는 실력이 100% 이상일 때도 나서지 않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럴 때마다 어른들은 말하셨다.
애들은 열두 번도 더 변한다. 그러니 걱정 말아라.
정말 어른들 말씀은 틀린 게 없다. 우리 아이가 변했다.
하교시간이 체감상 한참 지났는데 아이가 오지 않는다.
나는 또 머릿속으로 영화 한 편을 찍었다.
반장이 돼서 친구들한테 축하받느라 늦게 오나. 친구들하고 맛있는 거 사 먹을 수 있게 용돈을 조금 줄 걸 그랬나. 아니야. 당선이 안 돼서 혹시 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건가. 울고 있으면 어쩌지. 상처받아서 다시 도전 자체를 안 한다고 하면 어떡해. 아주 오만가지 생각으로 영화 열 편을 찍어댔다.
혹시 모를 후자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위로의 말을 생각해 냈다.
속상하지? 열심히 준비했는데 결과가 기대했던 대로 나오지 않아서 속상할 거야. 다음에는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있으니 너무 실망하지 말자. 넌 오늘 정말 용기 있는 일을 한 거야.
이것보다 좀 더 멋진 말을 해주고 싶어 챗 GPT에게도 물어봤다. 내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은 답을 냈다.
다시 네이버를 켜고 반장에 떨어진 아이 위로하는 법을 검색했다. 몇 안 되는 위로법 중 제일 눈에 띈 위로법. <반장에 떨어진 아이 위로차 애슐리 퀸즈가기>란 제목으로 쓰인 글이 눈에 들어왔다. 어떠한 말보다 애슐리 퀸즈의 위로 만족도가 더 높다는 현실적인 위로법. 그래 이거다. 아이가 힘들어하면 애슐리퀸즈라는 카드를 꺼내자.
띠띠띠띠띠 띠리링. 엄마!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기분이 좋은 것 같은데? 그래도 평정심을 찾고 아이를 맞이했다.
오늘 좀 늦었네? 오늘도 학교 잘 다녀왔어?
응! 잘 다녀왔지.
몇 차례 더 이야기를 건넸지만 내가 기다리던 반장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오늘 선거 나간 건 어떻게 됐어?
당선 안 됐어요. 7표 나왔어요.
아 그래? 그래도 7 표면 괜찮네! 오늘 저녁 치킨인 거 알지?
앗싸! 치킨!
뭐지. 너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건데.
네가 아무렇지 않으면 나도 그런 척해야 하잖아.
내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영화에서는 당선이 되면 환호와 기쁨이 있고 떨어지면 눈물과 슬픔이 있었는데 지금 이 분위기는 예상하지 못했던 장르인데.
아이는 당선이 안 됐다고 해서 실망하지도 않았으며 슬퍼하지도 않았고 좌절하지도 않았다. 내가 준비한 위로의 말과 네이버의 도움으로 찾은 현실적인 위로의 방법인 애슐리퀸즈 카드는 꺼낼 필요가 없었다.
마치 아이가 작은 거인 같았다. 잠깐이었지만 어른보다 더 멋져 보였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암시했다.
엄마 나 2학기 때 또 반장 선거 나가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