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언젠가 그날을 기억할 너에게.

힐링에세이

by 봄볕


어느 날, 문득 눈을 떴을 때, 나는 여든 살 노인이었다.

주름 가득한 낯선 얼굴,

그 하나하나의 골마다

한 시절을 견뎌낸 사연들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한 때 사회에서 인정받던 나,

젊고 활기찼던 스무 살의 나는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쓸쓸한 노인만이 덩그러니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흔하디 흔한 장면들이 꿈처럼 아득하게 스쳐 지나갈 때,

가슴을 가장 먹먹하게 만든 건

어느새 자라 나를 떠나버린 아이들이었다.


늘 곁을 맴돌며 웃고 울던 아이들은

이제 저마다의 삶에 치여 바쁘게 살아가고,

친구 같던 남편도 어느새 깊게 늙어 있었다.

사랑하는 부모님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그 따뜻한 목소리도,

온기 가득했던 손길도

더는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멀어져 있었다.


"엄마! 나는 결혼 안 하고 엄마랑 평생 살 거야."

내 귓가를 간지럽히던 아이들의 앳된 목소리가

날카로운 송곳처럼 마음을 찔렀다.

가슴이 터질 듯 먹먹했다.

한 번만 더,

그 목소리와 그 온기를 느낄 수만 있다면.

정말 단 한 번만이라도 돌아가서 그 품에 안길 수 있다면.


그랬더라면,

나는 매일 아침 아이들을 다그치며 재촉만 하던

모진 엄마로만 남지 않았을 텐데.

"일어나야지."

"서둘러야지."

"빨리 먹고 준비해야지."

나는 늘 다그쳤고, 늘 바빴고,

늘 조급했던,

마음이 닫힌 사람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 조그마한 아이들에게...

그저 말없이,

그 작은 어깨를 한없이 쓰다듬어주기만 해도 됐을 텐데.

잠결에 품으로 파고들던

조약돌 같은 발가락을 더 많이 어루만져줄 걸 그랬다.

이유 없이 날 보며 꺄르륵 웃던 그 얼굴을

밤새도록, 가만히 들여다보며 사랑할 걸 그랬다.

하루쯤은 이유 없는 칭얼거림조차

그저 품 안에 안고 다독여도 괜찮았을 텐데.

왜 그렇게 나는 너희를 밀어내듯 몰아붙이며 다그쳤을까.

어지럽고 소란스러운 저녁 식탁 앞에서

한숨 섞인 잔소리로

그 소중한 시간을 스스로 망쳐버린 나는,

어쩌면 그때가 얼마나 귀한지 정말 몰랐던 거다.

그 무지함이, 이제야 가슴을 아프게 파고든다.


"나중에."

"조용히 해."

"방 좀 치워."

그 말들 대신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그 말들로 너희들의 마음을 풍선처럼 포근하게 채워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조금만 더 자주,

조금만 더 가볍게

내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게 했더라면.

그랬더라면,

너희의 하루가 얼마나 따뜻했을까.


그날들엔,

사소한 일에도 티격태격하던 남편과 나도 있었다.

작은 아쉬움이 쌓여 쉽게 터지던 날들.

서로를 할퀴고, 후벼 파던 날들이 지나고 나니,

왜 그때는 늘 나만 더 힘들다고 여겼을까.

왜 너만 이걸 못하냐며

서운함과 원망을 건네며 서로를 밀어냈을까.

왜 우리는 그때,

조금만 더 서로에게 따뜻할 수 없었을까.

참 젊었고, 참 서툴렀고,

그럼에도 누구보다 애썼던 그를

나는 왜 가만히 안아주지 못했을까.

묵묵히 견디던 그의 등을

왜 더 많이, 더 따뜻이 토닥여주지 못했을까.

그땐 우리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참 서툴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나의 부모님.

늘 곁에 있었기에

영원할 줄만 알았던 그 존재들.

수화기 너머로 들리던 "딸, 언제 와?"

그 목소리를 나는 수 없이 돌려 듣고 또 들었다.


텅 빈 거실에 홀로 앉아,

문이 열리고 내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던

무수한 밤들.

그 마음, 그 기다림을

그때는 왜 외면했을까.

귀찮은 듯 대답하며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보던 내 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선명해 숨이 막힌다.

그날, 무너진 마음으로 엄마를 찾아갔던 날.

엉엉 울던 나를

그저 말없이 안아주던 따뜻한 품 안이,

그 온기가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지금 와서 염치없게도, 한 번만 더 그 품에 안겨 잠들 수 있다면,

나는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부모님의 손을 꼭 붙잡고,

볼을 비비며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그 모든 말들을 모조리 쏟아낼 텐데.


그날들에 서 있던 거울 속의 나는

충분히 젊고 예뻤다.

"너 참, 예쁘다"

"정말 사랑스럽다."

그 빛나던 날들 속의 나에게

더는 그렇게 힘들지 말라고,

제발 그렇게까지 아등바등 살지 말라고,

스스로를 의심하지 말라고.


가만히 등 뒤로 다가가 움츠린 어깨를 쓸어주며

다정히 속삭여주고 싶다.


여든이 되고서야 겨우 알게 된 것들.

너무 늦게 찾아온 후회들이 가슴 깊숙한 곳을 사정없이 헤집고 지나간다.


정말 괜찮았다고,

충분히 잘했다고,

너 참 좋은 엄마였고,

좋은 딸이었고,

좋은 아내였다고.


그 시절의 나를 한없이 토닥여주며,

아주 오래, 아주 오래 안아주고 싶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기적 같은 시간 안에

나는 그때의 나를 찾아가

꼭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 모든 순간이

기적이었고, 사랑이었다고.


나는 오늘,

아직 닿지 못한 나의 여든을 떠올린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내가 가진 전부였던 시간을 조용히 돌아본다.


그리고 문득,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무도 당연했던 것들이

정말 내 곁에 있었던 적이 있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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