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태어난 여인-1

9화 세월 , 빠워(power), 빠워

by 개똥이엄마

너 이다음에 결혼해서 아기 낳는 것까지 보고 죽어야지,라고 말씀하시던 할머니가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얼마 후 아버지도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거기다가 중간중간, 난 세 번의 유산을 겪었다.

이 모든 일이 2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벌어졌다.

첫 번째 계류유산 후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어느 날 아침, 난 오후 출근 전 자리에 누워 뒹굴 뒹굴 거리고 있었다. 마침 티비 방송에서 이색적인 여행지 한 군데를 소개했다. 서해안 어디 어디라며 리포터가 흥미로운 듯 버섯 모양 집 안을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감탄하고 있었다. 학창 시절 보았던 만화, 스머프에서 나오는 버섯집 모양 그대로였다.

“재밌네... 저런 데서 한번 자보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마침 나는 어딘가 훌쩍 갔다 와야 되나, 어쩌나 하던 중이었다.

“그래, 갔다 오자. 마음도 한결 편해질 거야...”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도 흔쾌히 동조했다.

둘 만 갈까, 생각했던 여정이 엄마, 아빠도 함께 가는 걸로 바뀌었다. 아마 두 분도 딸내미 유산에 상심이 적잖이 있었을 테고 겸사겸사 치유가 목적이었다.

신혼집 앞 단골 치킨집에서 난 훈제닭까지 사다 아이스박스에 채워뒀다. 바비큐에 고기와 같이 올려 구워 먹을 요량이었다.

출발하기 전날 저녁, 엄마가 다급하게 전화를 했다.

“딸아, 이왕 가는 거 이모랑 이모부도 데려가면 안 돼? 너희랑 바닷가 간다니깐 이모도 가고 싶어 하네? 여럿이면 더 좋지 뭐,,,”

“그래, 뭐. 안될 건 없지... 인원 추가하고, 뭐... 암튼 알았어, 엄마...”

조용한 곳에서 내가, 나를, 토닥토닥 해주고 살짝 센티하게 폼 잡고 있다 와야지, 하던 계획에서 조금 어긋나긴 했지만 그런대로 수긍했다.

원래 불만사항이라는 게 별로 없는 남편은

“어, 어, 그러자. 오케이” 그러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엄마, 아빠를 데리러 가려고 집을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야, 엄만데, 어제 이모부가 외갓집에 전화해서 얘기하다가 큰삼촌이 우리끼리 놀러 가는 거 알았나 봐, 큰 외숙모가 전화 와서 하는 말이 큰삼촌이 삐졌대, 저희는 안 데려간다고...”

난 순간 아무 말도 안 나왔다.

“그러니 어떡하니, 가자고 해야지 뭐... 이모부가 큰 삼촌네 들러서 펜션으로 다 데리고 오겠대”

암만해도 엄마가 주도한 게 틀림없다.

이모네도 , 큰 삼촌네도.

하여튼 이 정도면 집안 어른들 여행 가시는데 우리 부부가 따라붙는 모양이 돼버렸다.

결국 핑계김에 엄마는 오랜만에 친정식구들과 딸이 예약해 놓은 펜션에 놀러 간 셈이 됐다.

며칠 전 내가 짧은 여행을 간다, 했을 때 엄마에게 말한 게 있었다.

“좀 추스르고 올래... 아빠도 요새 답답해하시고, 할머니도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됐고... 조용히 있다 오고 싶어...”

내가 한 말은 어디로 다 샜는지 그렇게 시작된 여정은 도착하자마자 분주했다.

엄마는 오는 길에 눈여겨봤던 어판장에 이모와 이모부를 데리고 장을 보러 갔고 그동안 우리 부부는 바비큐에 올릴 음식 세팅을 하고, 술을 사다 날랐다. 슬슬 바닷가나 거닐다 천천히 늦은 저녁이나 해 먹으려 했던 계획은 아예 실행해보지도 못했다. 소란스러운 식사시간이 지나고 저녁이 되자 그제야 남편과 난 펜션 2층 테라스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후덥지근한 바닷바람에 어느새 내 얼굴은 그을려있었다. ‘쨍쨍한 햇빛에서만 피부가 타는 게 아니구나...’ 몰랐던 사실이었다.

펜션 마당에 서 계시던 큰 외숙모가 올려다보며 내게 말했다.

“아니, 생질...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이렇게 왔는데 덕분에 너무 좋네, 호호호, 답답하게 집에만 있다가 앞, 뒤 펑펑 터진 곳에서 바다 바람 쐬고, 고마워서 어째... 둘이 오붓하게 지냈으면 더 좋았을걸. 그지?, 죄다 몰켜와서 미안하네...”

아마 큰 외숙모가 앞뒤 사정을 대강 짐작하고 하시는 말씀이셨으리라...


평상시에도 원체 말씀이 없으셨던 아빠는 뭐가 불편하셨는지 일찌감치 식사 자리를 뜨셨고 따라나선 나와 함께 주변을 걷다가 바로 펜션 안으로 들어가셨다. 주변이 새까맣게 어두워져 바닷가 내려가 걷기를 결국 포기한 우리 부부도 안으로 들어가 티브이를 틀어놓고 아빠와 셋이서 거실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밖은 엄마와 이모, 큰삼촌, 외숙모가 앉아 두런두런 나누는 얘기소리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아침에 출발해 운전을 거의 도맡았던 나도 피곤해 나가떨어질 만도 한데 낯선 곳에 오면 미친 듯이 각성되어 잠 못 자는 태생이라 밖의 술자리가 파해질 때까지도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아빠는 진즉부터 잠자리에 들었지만 안 주무시고 계신 건 안 봐도 뻔한 일이었고 남편은 내내 티비 앞에 누워 이것저것 돌려 보고 있었다.


펜션은 엄마, 아빠, 우리 부부 넷을 생각하고 예약한 방이라 넓지 않은 곳이었다. 거실 겸 방이었던 1층에 일렬로 매트를 깔아 여섯 사람의 잠자리를 만들어놨다. 1층 한편 벽 쪽에 있는 계단은 2층 방으로 올라가게 돼있었는데 만약 우리 집 식구 넷만 왔다면 남편과 내가 묵을 방이었다.

하지만 이미 일찍부터 올라가 누워버린 이모부 탓에 그곳은 이모네 차지가 돼버렸다.

큰 외숙모가 웬만큼 앉아계시다가 마당에서 들어오셨고 늦게 엄마와 큰삼촌이 들어와 누워 곧 잠이 드셨다. 이후에 남편은 소리를 죽여놓고 축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큰삼촌이 어쩌다 깨서는 남편에게 티비 좀 끄라고 하셨다. 화면에서 나오는 불빛이 반짝이는 게 불편하셨던 모양이다. 그러고는 큰삼촌은 곧 다시 잠이 들었고 남편은 괜찮겠다 싶었는지 계속 축구를 봤다. 20분도 안되어 큰삼촌이 다시 깨셔서 재차 티브이를 끄라 하셨는데 이번엔 언성이 좀 높았다. 남편은 머뭇하더니 하는 수 없이 끄는 기색이 분명했다. 눈 감고 있어도 다 보이는 게 있다.

사실 아빠도 아무 말 없이 눈만 감고 계셨지 주무시는 건 절대 아니었다.

티비를 끄자 큰삼촌은 곧 코를 고시며 주무셨고 남편은 얼마간 뒤척이다 잠이 들어버린 듯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던 시절이 아니었다.

불편하고 긴 밤을 답답하게 견디고 있는 사람은 아빠와 나, 둘 뿐이었다.

손위 매부지만 술에 취해 코 골며 자는 늙은 처남을 다 같이 놀러 온 마당에 아빠가 뭘 어쩌겠는가. 이게 뭐 하고 있는 건지... 난 한숨 쉬며 새벽 넘어서까지 시간을 짓이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삼촌이 깨셨다. 그리고는 바로 옆에 있는 큰 외숙모를 깨우기 시작했다. “이봐, 이봐, 물 좀 가져와, 얼른, 어?”

큰 외숙모가 잠에 깨서 무겁게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눌려있던 척수가 펴지듯이 조용한 움직임이었다. 곧 방을 나서고 현관에서 펜션 마당으로 이어지는 계단 밟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계단 위에 한 걸음씩 찍어 내려 붙이는 소리가... 그 소리에 난 잠이 더 바짝 달아나서는... 내 심장도 함께 쿵. 쿵. 쿵... 내려앉았다. 다 내려가셨는지 펜션 앞마당에 깔린 자갈 위를 저벅저벅 걸어가는 소리가 났고 이어 마당 구석에 공동으로 쓰는 정수기 앞쯤이었는지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정수기 옆에 있던 컵을 놓고 물 받는 소리가 들렸다. 또르르르... 컵을 집어 들고 다시 저벅저벅, 천천히, 급할 것도 없는 발걸음 소리가 다시 났다. 다시 쿵. 쿵. 쿵. 계단 오르는 소리가 났다. 난 자는 척 눈감은 채 그다음 이어질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큰 외숙모는 방에 들어오시더니 큰삼촌한테 물컵을 내미는 것 같았다. 큰삼촌은 바로 앉아 물을 꿀꺽, 한 모금 들이키시더니 “아니, 찬물을 가져와야지! 이 사람아, 미지근한걸 어떻게 마시라고, 이런, 다시 떠와! ”

그 역정에 난 흠칫 놀랐는데 그때 옆에 누운 아빠 낌새가 분명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빠도, 나도 함께 무안을 당한 것처럼, 그냥... 그냥 누워있었다.

잠깐 정적이 있었지만 말 한마디 대꾸 없이 이내 큰 외숙모는 몸을 조용히 일으켰다.

다시 계단을 쿵. 쿵. 쿵. 내려가는 소리가 아까보다 더 크게 들렸다.

난 그때 너무 놀랬다.

‘이게,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아니, 무슨... 이런 경우가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그냥 마셔욧!!! , 하고 외숙모가 말해야 정상 아닌가? 였다.

아니, 애초에 떠다 줄 물도 아니다. 물 떠다 주는 사람의 자의가 아니라면... 집이었다면 또 몰라도.

바닷바람 소리도 멈췄고 멀리서 들리던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도 내 잠을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다.

마당 구석 정수기에서 다시 물 뽑는 소리, 이어 외숙모가 도돌이표를 밟듯이 좀 전과 똑같은 박자로 걸어서 방에 돌아오셨다.

큰삼촌은 벌컥벌컥 물을 마시더니 다시 바로 잠이 들었다.

잠 못 이루고 이 상황을 눈 감고 듣고 있던 사람은 그때까지도 아빠와 나뿐이었다.

그날 밤은 지금까지 나의 숱한 불면의 밤들 중 아직도 명징한 불면의 밤 중 하나가 돼있다.

항상 마주치면 나를 이뻐하고 다정했던 큰삼촌이 큰 외숙모나 외사촌들에게는 그렇지 않으시다, 라는 걸 어렴풋이 느낀 게 아마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그 후로 꽤 긴 시간이 지나 수십 년 집안 대소사에 지칠 대로 지친 큰 외숙모가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자 외사촌이 부르르 떨면서 내게 말했다. “누구든 우리 엄마 앞으로 건드리면 아빠도 가만히 안 둬... ”.

이 말을 들은 지가 십 년도 지났지만 난 외사촌에게 그 옛날 펜션 사건? 은 아직도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일러바치지 않았어도 야무진 외사촌들은 힘을 합해 큰 외삼촌을 반쯤 계몽시켜 놨다.

그래서 지금 큰 외숙모의 고생은 훨씬 덜 하다.

그 모양을 보는 큰누이인 내 엄마나 다른 이모들은 제 동생이, 제 큰 오빠의 코가 쭉 빠진 모습이 애처로워 안달이지만, 세월 앞에 뭐 어쩌겠는가...

꼬박꼬박 기다리다 보면 이루어지는 일도 생기고, 상상도 못 하던 일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세월의 막강한 힘... 그 앞에서는 누구든 겸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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