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뚫린 옷에서 소주 한 잔의 낭만에 이르기까지
며칠 전 저녁의 일이다.
외출에서 돌아와 옷을 갈아입은 아이의 모습을 보고 아내와 나는 배를 부여잡고 웃었는데, 배한가운데가 뻥하니 뚫려있는 잠옷을 아이가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뚫린 옷 사이로 드러난 배를 보며 박장대소하는 엄마와 아빠의 모습에 영문을 몰라 머리 뒤쪽을 긁으며 아이는 계면쩍게 따라 웃었다.
웃음을 그친 후 왜 그렇게 되었는지 연유를 물은 아내에게 돌아온 아이의 대답은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옷을 입는데 보푸라기 같은 게 있어서 잡아당기자 계속 실이 이어져 나왔고,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해 실을 가위로 잘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 생긴 보풀은 그렇게 해도 없어지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실을 당기고 자르기를 반복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평소 손톱 주변에 거스러미라도 생기면 손이나 입으로 뜯어내 살점이 벗겨지게 만들던 아이의 예민함이 옷에 생긴 보푸라기를 보아 넘기지 않았고 결국은 배에 자신의 얼굴 크기의 구멍을 내버리게 된 것이었다.
결국 아이의 잠옷에 뚫린 커다란 구멍은 온 가족에 웃음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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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옷에 뚫린 구멍을 보다가 문득 20년도 더 지난 사건이 생각났는데, 일의 발단은 술 때문이었다.
내가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한 90년대 초반은 많은 부분에서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특히 회식자리의 문화는 MZ로 대표되는 지금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잔을 돌리는 일이 빈번했고, 술이 약해서 마시지 못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마시게 하는 일도 성행했기에 나처럼 주량이 약한 이들에게는 회식 날은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일단 한두 잔만 들어가면 천장이 빙빙 도는 느낌이 들면서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쏠리는 토악질을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어머니는 아들이 술 마시는 것 자체를 싫어하셨기에 회식이 끝나더라도 술기운이 어는 정도 사라질 때까지 배회하거나, 술기운을 없애지 못하면 친구의 자취방이나 회사 실험실에서 하루를 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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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갑작스럽게 회식이 잡혔는데, 나의 진급을 기념하는 자리여서 술을 잘 마시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집중 표적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그날은 겨울 중에서도 유독 추운 날이어서 집 바깥에서 술이 깰 때까지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던 나는 취기를 다스리지 못한 상태에서 집으로 들어갔다.
안방에서 주무시는 부모님께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린 후 대충 씻고 방에 누웠는데, 눈을 감자마자 천정이 빙빙 돌기 시작하면서 울렁거리는 속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 방에서 화장실까지는 불과 2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토악질을 이기지 못한 나는 먹었던 모든 것을 이불에다 게워 내버렸다. 취해서 몽롱한 상태였음에도 토사물이 묻은 이불을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책상 위에 있던 가위를 들고 오바이트가 묻은 부분을 그대로 오려서 쓰레기통에다 버리는 황당한 선택을 했다.
다음 날 사실을 아시게 된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이가 없으셨는지 웃으실 뿐이었고,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순간 평소의 나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만행을 하도록 만든 술이 정말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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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약해서 평소에도 술을 잘 마시지 않는 내가 술과 친구가 된 때도 있었다.
대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입학할 때 약속받았던 장학금을 날려먹은 후 나는 독일문화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학비를 위해 부모님에게 손 벌리는 것이 미안했던 내가 문화원에 다니기 시작하게 된 것은 학비가 들지 않는 독일로 유학을 가야겠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유였다.
매주 3번 남산에 있던 괴테문화원에서 수업을 받고 서울역 쪽으로 내려올 때쯤이면 대략 밤 8시가 되는데,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식사를 할 여력이 없었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이 포장마차처럼 늘어선 김밥 집이었다.
한동안 나는 풀 방구리에 쥐가 드나들 듯 그곳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초겨울 추위에 남산을 내려온 나는 언 손을 녹이며, 김밥 한 줄과 어묵국물을 안주삼아 소주 한두 잔씩을 친구 삼아 허기진 배를 채웠고, 단골이 된 가게의 아주머니는 시답잖은 내 소주를 따로 키핑 해두었다가 제공하는 세심한 배려까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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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 시절 언 손을 호호 불며 마시던 한 잔의 소주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