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동안 감춰왔던 비밀의 고해성사
매일같이 아이의 등교와 하교를 내가 담당하고 있는데 집과 직장이 가까운데다 일반회사에 다니는 아내에 비하여 업무시간을 조정하는 것이 다소 쉽다는 점이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늦은 나이에 아빠가 되었기에 지금부터라도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식의 보상심리의 작용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초등학생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손이 많이 가는 바람에 아침에 아이를 등교시키고 나면 이미 온 몸에서 진이 빠져 하루를 보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그러다 보니 등교전쟁이라는 말도 생길 정도인데,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등교의 어려움에 대해서 쉽게 공감할 것이다.
…
등교전쟁에서 만나는 첫 번째 난관은 잠자고 있는 아이를 깨우는 일이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나를 닮아 아침잠이 많은 아이를 깨우는 일은 녹록치 않은 일이다.
처음엔 애걸복걸하기도 하고 자는 아이를 윽박질러도 봤지만 소용없어 고심을 거듭하다가 찾아낸 방법은 아이가 관심을 기울이는 TV채널을 틀어놓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방법이 아이를 깨우는 데에는 효과를 발휘하지만 또 다른 골칫거리를 제공한다는 데에 있는데, TV에 정신이 팔려 밥을 먹는 일을 소홀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졸음을 이기지 못해 밥을 입에 문채 꾸벅대고 있는 아이를 보면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지만 제 시간에 학교에 보내기 위해 밥을 씹으라고 닦달하게 되는데, 가뜩이나 밥 먹는 속도가 느린 아이가 멍하니 TV에 넋을 놓고 있으면 애처로움이나 인내심은 순식간에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게 된다.
결국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면 서러움을 이기지 못한 아이는 울먹이며 볼멘소리로 말대답을 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차라리 지각을 하는 일이 있어도 싫은 소리를 하지 말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미어질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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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를 키우면서 어머니의 수고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세 명이나 되는 아이를 하루도 빠짐없이 제시간에 먹여서 학교에 보내려면 얼마나 많은 정성이 필요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더욱이 당시만 해도 지금과는 사뭇 달라서 토요일까지 학교를 보내야 했고, 도시락까지 집에서 싸서 보내야 했으니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힘이 들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초등학생들이 받는 개근상은 아이들에게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등교를 위해 모든 애를 쓰시는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수여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누구보다도 이 상을 받을 자격을 갖추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졸업식 때 나는 개근상을 받지 못했다.
그것도 나의 어처구니없는 실수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너무 어려서 오직 부모님께 혼날 것만 걱정되었던 나는 사실을 말하기보다는 모르겠다며 이유를 얼버무렸다.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셨던 부모님은 서울로 전학을 위해 수속하는 과정에서 본인들이 일처리를 제대로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하셨고, 이후 도리어 나에게 미안함을 가지셨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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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생이던 70년대는 지금과는 달리 학교에 빠지는 것은 물론 지각이나 조퇴조차 상상할 수도 없었는데, 자기 역할을 다하는 것이 성실함을 가늠할 기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상 때문인지 나는 감기가 걸리거나 열이 있을 때도 기를 쓰고 학교에 갔고, 어머니께서도 초·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12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의 등교 수발을 들었다.
그런데 난 초등학교 1학년 때 딱 두 번 결석한 일이 있었는데, 두 번 다 나의 어처구니없는 실수 때문이었다.
첫 번째 결석을 한 이유는 쉽게 믿기는 어렵겠지만 나의 어두운 길 눈 때문이었다.
학교에 가던 길에 시장에 들어온다는 서커스 장을 잠시 구경하고 싶었던 나는 잠시 둘러보겠다는 생각으로 가려진 천막을 통해 들어갔지만 나온 길과 들어간 길이 다르다는 사실도 파악하지 못한 채 길을 걷다가 헤매다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수업이 끝나있었다.
두 번째는 2부제 3부제를 하던 당시의 상황 때문이었다. 지금은 학령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1974년만 해도 늘어나는 아이들을 감당하지 못해 저학년의 경우 2부제나 3부제 수업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아침반이었는데, 오후반으로 잘 못 알고 있던 나는 당연히 또 한 번의 결석을 기록해야 했다.
결국 부모님도 모르게 학교에 빠지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음에도 나는 집에다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았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누나조차 내가 결석한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 부모님이 이를 알아챌 리는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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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부모님에게 고백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어렸던 나는 부모님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다른 집에 비해 엄격했기에 사실을 말하면 혼날 것이라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더욱이 개근상을 못 받은 나에게 부산에서 서울로 전학하는 과정에서 일처리를 제대로 못했다며 미안해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사실을 말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그 후 결혼할 때까지는 내가 결석한 사실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인해 해가 갈수록 미안한 마음은 점점 더 커졌다.
아마도 내가 부모님에게 감춰두었던 비밀을 고백한 것은 결혼하고 아이의 아빠가 된 후였으니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도 벌써 40년이 넘은 시간이 흘렀다. 오히려 개근상을 내가 받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던 부모님이 듣기엔 더욱더 나의 고백이 어처구니없었을 테지만 비밀을 털어놓은 나는 약간이라도 개운해졌다.
뭐 이왕지사 지난 일이라도 털 건 털어야 할 테니 말이다.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