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밤새서 작곡을 하다

뚜식이`

by 디오게네스

필자는 깜짝 놀랐다. 저게 언제부터 있었지? 못 보던 자동차 다이캐스트 하나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토미카에서 만든 30만 원짜리 모형이 그대로 놓여 있었던 것. 너무 비싸서 가질 엄두도 못 냈던 물건인데 그냥 놓여 있었다. 가족 중 한 명이 준 선물임이 틀림없었다.


'와, 이게 꿈이야, 생시야. 이런 건 단종돼서 중고로도 40만 원은 줘야 하는데.'


마침 며칠 전 필자의 생일이 있었다. 부모님이나 동생이 몰래 두고 간 모양이다. 흑, 평소에 잘해 드리지도 못했던 것이 생각나서 가족 톡방에 3명 몫의 상품권을 뿌렸다.


-어머, 웬 상품권이니?-


-형, 이거 비싸지 않아?-


-그냥 좋아서 드리는 거예요. 받으세요.-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지. 필자는 새로 받은 모형을 조심스럽게 장식장에 넣고 공부를 시작했다. 음대 편입 시험이었다. 사실 필자는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 아버지부터 오케스트라에 지휘자셨던지라 어렸을 때부터 늘 음악을 동경해 왔던 것. 이론이나 음악 사조보다는 선율 그 자체에 끌렸다. 그래서 종종 작곡을 했고, 대회에서 상을 탈 때마다 부모님은 자동차 모형을 한 대씩 사 주셨다.


자동차 모형이 여덟 대 쯤 모였을 무렵 필자는 수험생이 되어 입시를 치르게 되었다. 하지만 필자가 만든 곡을 본 심사위원은 모두 어두운 표정이었는데, 알고 보니 음표를 반대로 쓴 것이었다. 음표를 직접 그리는 필기시험이라서 벌어질 수 있던 실수였다. 지금까지의 세월들이 산산이 흩어져 귓가를 어지럽게 울렸다. 쓰러질 것 같았다.


그냥 죽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길거리를 가득 메운 재수학원들을 보고 마음을 고쳤다. 3수, 4 수생도 열심히 공부하는 마당에 한 번 실패했다고 물러서면 정말 한심한 사람이 된다고 믿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원서를 넣은 다른 대학교에서 합격 연락이 왔다. 서울 K대학교의 중문과였다.


답은 분명했다. 대학을 다니며 음악 공부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설령 재수에 실패해도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었으니 필자는 그 길을 택했다. 그렇게 낮에는 중국어 공부, 밤에는 작곡에 매진했다. 두 공부 모두 지루해지면 틈틈이 브런치에 라면 글을 올렸다. '뺏어 먹는 라면이 더 맛있다'라는 글이다. 어느 날 세제에 라면을 끓여버린 글이 몇 만 조회수를 기록하는 걸 보고 시작한 요리 칼럼이다.


낡은 필자의 방에서는 악기 소리와 라면 냄새가 매일 흘러나왔다. 비싼 피아노는 살 수도, 연주할 형편도 못 되어 어플로 쓰는 전자 피아노에 의존해야 했지만 말이다.



'휴, 이제야 잠이 든 모양이네. 빨리 나가야지.'


민재는 인간을 보며 생각했다. 무언가 열심히 쓰다가 그대로 잠에 빠졌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 그 인간이 민재를 잡으려는 찰나 모형으로 변신했으니 말이다. 인간은 민재를 장식장에 다른 모형들과 함께 놔두었다. 이제 빠져나갈 일만 남았다.


'아따, 이놈은 잠도 이렇게 살벌하게 자냐.'


인간이 쿨쿨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렸다. 마침 천장에 환풍구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변신술을 쓰기만 하면 된다.


'저건 뭐지... 음표?'


민재의 눈이 인간이 베고 쓰러진 종이로 향했다. 익숙한 기호들이 가득이었다. 그렇다면 이 인간도 작곡을 하는 것인가? 얼마 전까지 거인에게 죽을 뻔한 민재였지만 어쩐지 그에게 끌리는 기분이 들었다. 밤새 작곡을 하는 거인이라면 조금 특별하지 않은가. 기왕 자고 있겠다, 민재는 거인이 쓰던 악보를 찬찬히 둘러보기로 했다.


'재수 교향곡. 이상한 제목이네.'


전반적으로 훌륭한 노래였다. 가볍게 시작한 멜로디가 점점 화려해지고 풍성해졌다. 중간중간에 높은음 몇 개가 추가되었는데 작은 설명에 '자동차 모형'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낮은음으로 바뀌었다. 모두 불협화음뿐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앞의 밝은 파트를 거꾸로 적은 것이었다. 그 이후로는 다시 분위기가 밝아졌다.


민재는 그 악보를 조금 손보았다. 어색한 부분은 매끄럽게, 변주가 필요한 부분에는 변주를 넣었다. 물론 원래 곡을 훼손하지 않도록 다른 종이에 적었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적다 보니 민재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느덧 해가 떠오르고 거인이 조금씩 움직였던 것이다. 민재는 얼른 종이비행기로 변해 환풍구로 달아났다.


"지금이 몇 시인줄 알아? 왜 이제 돌아온 거야!"


"죄송해요. 바람 좀 쐬러 갔다가 1층까지 내려갔지 뭐예요."


민재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호통이 이어졌다. 민재는 학교 근처에서 길을 잃었다고만 변명했다. 민재는 그날 먹을 간식과 달 용돈을 압수당했지만, 사실 살아 돌아와서 기뻤다. 무서운 거인도 떠올랐다. 거인. 10 페이지 분량의 '재수 교향곡'도 머리를 스쳤다. 지금쯤 일어났을 텐데, 어떻게 되었을까?


-띠링-


'야, 민재야. 살아 돌아왔냐? 제발 말 좀 해주라. 아니면 신고해야 한단 말이야.'


'당연하지. 우리 아빠한테 이야기해서 베테랑들을 다 보낼 테니까.'


민아와 마이클의 문자였다. 얼른 무사히 돌아왔다고 답했다.


'와, 대박이네. 거기서 살아 돌아오다니. 너 용감하구나?'


민아가 답했다.


'그냥 운이 좋았어. 그런데 그 거인 있잖아. 작곡가인 것 같아.'


'설마. 그 괴물들이 무슨 작곡을 하냐? 잘못 본 거 아냐?'


마이클이 답했다. 민아도 맞장구쳤다.


'정말이야. 못 믿겠으면 이 사진을 봐봐.'


아까 민재는 몰래 찍어 둔 사진을 단톡방에 올렸다. 그 악보의 사진이었다.


'헐. 진짜일리가 없는데.'


'재수 교향곡? 그나저나 잘 썼다. 확실히 참신하기는 한 것 같아.'


민아가 답했다.


'이런 노래들은 후렴구가 다시 이어지는데, 이 노래는 같은 부분이 단 한 군데도 없어. 뭐랄까, 꼭 소설 같은 음악이야. 서론, 본론, 결론이 다 있는 그런 노래.'


민재가 들떠서 답했다.


'저, 늦었으니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나 지금 너무 피곤해.'


마이클이 말했다. 민재는 조용히 휴대전화를 끄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학교에서는 거인들은 사람을 잡아먹고 집을 부수는 나쁜 존재들이라고 가르쳤고, 실제로도 그렇다고 믿었다. 하지만 재수 교향곡이라니? 거인들에게도 학교가 있고 꿈이 있는 걸까? 민재는 그 거인도 자신과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니 괜히 한 구석이 씁쓸해졌다.


사실 민재의 방에서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집 밖에서도, 버스를 타고 나가도 하늘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하늘을 보기에 그들은 너무나 작고, 세상은 너무 크기 때문에다. 하지만 민재는 하늘을 보는 꿈을 꾸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꿈. 그 하늘 사이로 조용한 선율이 울려 퍼졌다.


pexels-pixabay-53594.jpg


keyword
이전 03화소시지를 먹어치우는 벌레